1900년대 초반 일제는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서울에서 부산에 철도를 놓기 시작하였고 또한 대전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철도를 놓으려고 하였다. 이 때 전주에 사는 유지들은 전주로 철도를 통과시킬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 전에도 공주로 경부선을 놓으려 할 때 공주의 유지들이 철도의 통과를 강력히 저지한 바 있었다.
공주와 마찬가지로 전주의 유지들이 이유로 든 것은 우리들의 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다. 즉, 전주의 유지들은 기차가 우렁차게 땅을 뒤흔들고 다니면 지하에 묻힌 조상의 혼들이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구천을 떠돌게 되면 후손들에게도 여러 가지 피해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당시에 소음을 내는 기계가 거의 없어 기차가 내는 소리는 엄청나게 큰 소리로 지축을 뒤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조상혼을 불안하게 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주민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결국 공주와 전주는 철도가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부선은 대전쪽으로 철도가 지나게 되었다. 호남선도 원래 공주에서 전주로 갈라지려 했는데 결국 대전에서 갈라지게 되었다. 호남선도 전주를 통과하기로 되었었는데 결국 이리와 김제를 거치는 선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합방을 한 후 강압적으로 군산에서 이리 전주까지 철도를 놓아 전주에도 결국 철도가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는 호남선에서 벗어난 전라선의 한 정거장에 불과하게 되어 갈수록 성장이 멈추게 되었다. 공주는 철도가 없어 더 침체하였고 공주대신 중요 역이 된 대전은 20세기 내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20세기초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전라북도 도민들의 조상숭배는 아주 뚜렷하였다. 도시, 농촌할 것 없이 4대봉사를 위해 적어도 8차례, 그리고 조상에 후처나 첩이 있는 집안은 10여차례나 제사를 지내야 했다.
제사를 지내는 과정도 아주 경건하였다. 일례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집 마당과 대문 앞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조상을 맞을 준비를 한다. 그런 다음 자시(밤 11시에서 1시사이)에 이르면 제주는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대문 앞으로 호롱불을 들고 나가서 경건한 자세로 조상신을 인도한다. 나의 어렸을 때 기억에 따르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할아버지는 누군가 진짜로 따라 오는 것처럼 정성으로 안방으로 인도하였다.
방안에는 이미 제상이 차려져 있고 지방이 모셔져 있다. 꼭 밤 12시가 넘어서 이렇게 모셔와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초헌, 아헌, 종헌 순으로 술을 올리고 조상신이 음식을 먹는 동안 방밖으로 나와서 기다린다. 보통 새벽 닭이 울 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에 꼬마들은 바로 잠들기 마련이다. 2-3시간 후 철상을 하고 음복을 한다. 이 때의 제사는 철저히 조상신이 눈 앞에 와 있는 것처럼 조심하고 경건하게 지냈다.
그런데 지금의 제사는 이와 다르다. 먼저 제사가 저녁시간에 이루어지는 집이 많다. 저녁 9시나 10시쯤 지내거나 아니면 아예 8시쯤 지내고 제사음식으로 저녁을 먹는 집도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도 이전처럼 대문밖까지 깨끗이 쓸고 조심스럽게 조상신을 인도하게 방안으로 들여오는 사람들은 없다. 그저 집안의 마루나 안방의 문을 조금 열어 놓으며 알아서 들어오겠지 생각하고 있다. 문이나 창문조차 열어놓지 않고 지내는 집도 있다.
제사를 지내면서도 진짜 조상신이 제상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50대이상의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 습관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따라서 조상신이 식사한다고 기다리는 시간이 과거에는 2-3시간씩 되었으나 이제 10분내지 15분쯤 기다리다 철상을 해버린다.
이러한 변화는 조상신에 대한 생각이 그 동안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70년대 초반까지도 어른이나 노인들이 조상의 혼이 있으며 제삿날에 꼭 찾아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들 조상신은 잘못 모시면 집안에 화를 가져오고 잘 모시면 집안에 각종 복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조상신을 두려워하였고 아주 조심스럽게 모셔왔다. 조상신을 잘 모시기 위해 좋은 묘자리를 골라야 했고 제사도 잘 모셔야 했다.
70년대 초반까지 고군산군도에서 조상이 돌아가면 초분을 해서 3년정도 지난 뒤 살이 썪어 뼈만 깨끗하게 남으면 그때서야 뼈만 골라 땅에 묻었는데 이도 깨끗한 뼈만 묻어야 조상신에게 잘 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신식교육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즉, 학교에서 증명되지 않는 것들을 믿는 것은 미신이라고 가르치는 바람에 개별적인 신앙이 점차 약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상신에 대한 믿음도 점차 퇴색하게 되어 현재의 사람들에게 조상신이 있는지 물어보면 대답을 못한다. 20세기 초반에 조상신의 존재를 모두 확신하고 있던 것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현재도 노년층은 조상신의 존재를 믿고 있지만 장년층은 조상신이 있는지 없는지 혼동스러워 하고 청소년층은 대체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조상신을 믿고 있는 노년층이나 장년층들도 과거처럼 경건하고 엄숙하게 조상신들을 모시지는 않는다.
그래서 70년대 이후부터는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조부모나 증조할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고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아니면 참석해도 형식적으로만 지내고 끝낸다. 아예 부모나 조부모 외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크게 늘고 있다. 아니면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그리고 둘째 증조할머니의 제사를 전부 증조할아버지의 제삿날에 통합해버린다. 과거에 할아버지의 첩까지 따로 따로 제사를 지내느라 10여차례 제사를 지내는 집도 많았지만 현재는 그렇게 제사를 지내는 집은 크게 줄어들고 있다. 또한 제삿날이나 차례에 콘도나 외국에 가서 지내는 집도 있다. 그리고 장남이 아닌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기독교의 증가로 제사를 추도예배로 대체하는 집이 크게 늘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주로 예배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간단히 음식을 장만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노래를 부르면 된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조상신에 절을 하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된다. 이 때문에 추도예배로 제사를 대치하려는 많은 기독교신도들이 일가친척으로부터 커다란 비난을 받아야 했다. 50년대에서 80년대초까지 이러한 갈등을 겪은 집안이 아주 많다. 특히 농촌과 어촌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90년대에도 나타났다.
앞으로도 조상신에 대한 믿음은 계속 약화될 것으로 보여 제사도 갈수록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제사의 수를 줄이고, 음식을 간편화하거나 아니면 시장에서 제사음식을 사다가 지내는 경우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지금의 N세대들이 성장하면 사이버공간에서 제사를 지내려 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면 디지털화면에 제상만 띄워놓고 꾸벅해버리지나 않을지...
/이정덕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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