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은 갔어도 그의 이름과 자취는 남는다.
한국서단의 거목 강암 송성용선생(19이 세상을 뜬지 1년. 선생이 있어 자랑스러웠던 전북은 이제 그 이름으로 묵향을 이어낼 수 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가 드리운 그늘은 여전히 깊어서 선생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만 느껴진다.
강암이 한국서단에 남겨놓은 예술적 업적과 그 자취는 대체 어떤 것일까.
지난 80년대 말부터 서예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서단의 고질적인 병폐를 과감히 지적하고 서예 본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 미술계의 주목을 모아온 전북대 김병기 교수(47, 중어중문학과)로부터 강암의 예술사적 위치를 들어보고 전북서단의 위상을 조명해보았다. 서예가이기도 한 김교수는 그동안 수많은 서예평론과 서론(書論), 서예 에세이 등 1백여편에 이르는 글을 발표했으며 서예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이론적 틀을 갖추어내는 학술적 작업을 적극적으로 펼쳐온 연구자다. 김교수는 강암이 있어 전주의 문화가 늘 윤기 있었고, 또 전주만의 문화적 전통이 있었기에 강암 같은 서예 거목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 21세기 빛낸 서예가, 그가 있어 한국서단은 빛났다.
“서예전문지 ‘까마’가 지난 12월호에 ‘20세기 한국을 돌아본다’라는 대담이 실렸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서예가들이 20세기 한국서예계를 빛낸 작가로 강암을 꼽았더군요. 물론 강암이외에도 한국서단에 우뚝선 서예가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서예가 고도의 문인정신을 표현하는 정신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단연 강암입니다.”
김교수는 ‘한국서단에 미친 영향이 크고 예술적 역량도 빼어났던 서예가들이 적지 않지만 일제를 거쳐나오면서 친일과 탐욕으로 예술정신을 퇴색시켜버린 서예가가 적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점에서 보자면 강암은 인품이나 학문, 예술적 경지에 이르기까지 고루 빼어났던 예술가라고 김교수는 꼽는다. 특히 그는 강암이 서법과 그 정신을 가장 중시했지만 끊임없는 변화와 창신을 추구해온 치열한 작가정신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일백 꽃의 향이 모여 꿀을 이룰 제, 그 꿀의 단 맛이 어느 꽃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어라.(會到百花成蜜時, 不知甛是何花來)’ 강암이 평생을 두고 읖조려온 구절.
“자신의 마음에 담아 둔 이 서결(書訣)처럼 강암은 백화의 향을 모으듯 겸수병축(兼收竝蓄)하였고 드디어 꿀과 같은 서예술의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평가하는 김교수는 강암의 예술세계를 ‘고도의 문인정신 표현으로서 서예의 본질미의 확립’으로 압축했다.
“강암은 시기적으로 서양의 문물과 서양식 사고에 의해 서예의 본질미가 변질되기 이전부터 가학의 영향으로 서예를 연마했습니다. 본원적인 서예를 유소년시절부터 몸으로 익혔으며 이후에도 일상생활 어느 구석에서나 전통적인 선비 정신, 고아한 문인정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평생을 일관해왔지요.”
김교수는 이와 함께 부단한 창신(創新) 추구로 서예의 현대미를 개척해낸 점이나 조화로운 법고창신으로 서예의 활로를 제시한 그 경지는 한국서단의 전범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 한국서단에 우뚝 선 전북서예의 맥
강암은 자신의 서예세계를 닦아내는 일 뿐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과 정신을 굵게 내려놓았다. 그의 후학들은 전북서예의 탄탄한 맥을 가꾸고 빛을 냈으며 한국서단의 재목들로 성장했고 그들의 활동은 한국서단의 오늘과 내일의 바탕이 되었다. 68년에 창립한 연묵회(회장 정운염). 전북도전을 만들어내는 기틀이 되었던 이 단체는 강암의 개인적 문하생 모임이지만 한국서단의 대표적인 서예가 모임으로 서있다. 한국서단에서 이름을 내놓은 작가만도 여러명. 한국서예협회를 창립해낸 송하경, 한국현대조형서예협회 이사장을 지낸 이용, 한국서예에 새바람을 일으켜온 박원규, 김규완 김승방 박승배를 비롯, 이미 한국서예의 중심에서 새로운 견인차 역을 해내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개인 문하생들의 친목을 다지고 정례적인 전시회를 갖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연마를 위해 연구활동에 적극나서거나 국제교류전을 시도하는 등 활동의 영역을 확대해온 것은 연묵회만의 특징이다.
“연묵회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작가들이 두텁게 포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연구력과 창작력을 갖춘 젊은 작가들 또한 열정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 지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한국서단의 선도에 서서 국제교류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는 역량만으로도 연묵회의 위상은 충분히 검증된다.” 김교수는 강암서예학술재단이라는 연구터전과 강암서예관이라는 창작의 터전을 바탕으로 연묵회는 한국서단에 윤기를 더해내는 활동을 더욱 활기차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 학문적 연구 더해져야 서예가 산다
전북 서예는 분명히 가능성이 있다. 전통도 뚜렷하지만 인재도 적지 않다. 한국서단에서 전북서단은 예나 지금이나 우뚝하다. 그러나 이 위상을 앞으로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김교수의 생각은 단호하다. “화려한 과거사에만 매달려 자기 연마와 함께 서예사의 본질적 정신을 찾는 작업에 더이상 등한 한다면 전북서단은 과거의 전통마저도 잃게 된다.”
김교수는 서예 발전을 위한 토양이나 형식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곳이 바로 전북이지만 오늘날의 상황으로 보자면 외적 내적 조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다고 말한다.
“서예를 제대로 발전시켜갈려면 학문적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비평문화 또한 정착되어야지요. 건강한 비평은 학문적으로 뒷받침되는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껏 처럼 인상비평에만 치우쳐있는 비평문화는 서예의 본질과 정신을 결코 살려나갈 수 없습니다. ” 김교수는 이론적 근거로 철저한 학문비평이 이루어져야만 예술로서의 서예 정신과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그역할을 전북서예가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전북서단의 위치는 위협받고 있다. 서예의 전통이 깊지 못한 지역의 서단이 열정적으로 서예 발전을 위한 학문적 연구 작업을 주도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미 대구의 서단은 학문적으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김교수의 설명이다. 서론을 공부하고 서예학회를 만들어 논문을 발표하면서 대구서단은 이미 한국서단에서 큰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 공모전, 본래 취지를 찾아야
전북에서 개최되는 정례적인 공모전은 3개. 미술협회 서예협회, 서가협회가 각각 주최하는 공모전이 그것이다. 공모전은 서예인구의 저변확대와 역량있는 신인 발굴에 취지를 둔 것.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당초의 취지가 많이 퇴색해있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들 공모전이 ‘지연과 학연을 방패로 삼으면서 오히려 서예가 설땅을 원초적으로 망쳐가는 경향이 짙다’고 비판한다. 공모전의 활성화가 다양한 작품 활동을 이어내는 바탕이라고 강변하는 측도 있지만 뚜렷한 기준없이 응모자의 대부분을 입상 입선시키는 것이나 아성을 구축하기 위한 그릇으로서의 역할이 우선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교수 역시 이러한 비판에 동의한다. 숫자늘리기에만 급급한 선정이 오히려 서예의 본질을 흐려놓는데다 옥석의 구분 조차 모호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점에서도 김교수는 학문과 이론이 뒷받침된 서예비평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0년부터 예술 정화론이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서예는 그 어떤 장르보다도 정화와 해탈, 깨우치고 정신을 승화시키는, 이를테면 이 혼돈된 시대의 문화를 맑게하는데 중요한 매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암은 바로 이러한 서예 정신과 본질은 온생애를 통해 구현한 위대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를 있게한 이 고장이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김병기교수 약력
-1954년 부안 출생.
-전주대 한문교육과 졸업.
-1981년 대만 유학. 대만문화대학에서 중국시학을 연구, 석박사 학위 취득.
-1989년 월간서예에 ‘서법의 법에 대한 소고’를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 서예와 관련한 학술논문 30여편, 서예 에세이 50여편 등 100여몊에 이르는 서론과 서예평론 글 발표.
-공주사대 교수 역임.
-1999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김. 저서로 ‘서예란 어떠한 예술인가’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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