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새로운 출발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왔다. 우리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해 공통적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탄생을 축하하고 국가의 설립을 축하하고 학교나 기업이 시작한 날을 축하하고 또한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날을 축하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의 첫날이며 달력의 출발인 1월 1일을 설이라고 불러왔다. 원단(元旦), 원일(元日), 정초라고도 부른다. "설"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으며, 언제부터 우리의 명절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만한 기원설이 나타나지 못하여 여러 설들이 분분하다.
그렇지만 정월초하루를 지칭하는 "설"이라는 말이 {수서},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세시기} 등을 비롯한 많은 문헌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대로부터 널리 쓰여 왔음을 보여준다. "설"은 새롭게 출발한다는 신선한 의미로 우리민족에게는 특별한 명절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설날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구분 없이 일손을 놓고 새옷 즉 설빔으로 갈아입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 후, 집안의 어른들과 이웃친지들을 찾아 세배를 올린다.
이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날을 축하함으로써 조상신의 보호를 받고 마을사람들과 가족의 우애와 협동을 증진시키게 된다. 또한 새로운 각오를 통해 과거에 일어났던 나쁜 일들은 버리고 앞으로 좋은 일들을 해나갈 각오를 다짐하게 된다. 이러한 풍속을 오늘날에도 전혀 변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동양 삼국의 설을 살펴보면 중국은 신해혁명이 성공하고 다음해인 1912년 양력으로 바꾸며 1월 1일을 개국일로 삼아 3일간을 공휴일로 정하여 관공서와 직장은 쉬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양력 정초보다는 춘절이라 불리는 음력정초가 더욱 성대하게 이루어 전국적인 인구이동이 이루어진다. 음력 정초에는 3일이나 5일정도 쉬는 것이 보통이고 예전에는 15일에서 30일간도 쉬었다. 일본은 1872년 태양력을 사용한 이후 양력 1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간을 "국민의 축일"이라 하여 공휴일로 정하였다. 일본은 모든 생활에서 양력만을 사용하고 있다.
양력 2000년 1월 1일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신문, 잡지, 방송은 앞을 다투어 보도에 열을 올렸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요, 새로운 백년의 시작이며,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의미 있는 날이다. 정부와 사회단체에서는 이러한 의미에 걸맞게 무수히 많은 축제를 통해 새해, 새천년을 기념하였다.
태양력을 1895년 사용하기 시작하고 박정희 대통령 때 양력설을 제도화 한 이후 모든 신문, 잡지, 방송에서는 양력설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특집기사를 내고 각계의 인사와 연두시 그리고 신년사를 싣게된다.
태양력을 도입한 후 가장 커다란 행사였던 이번에도 새천년이 바뀐 것에 대한 소감, 새천년에 붙이는 기대, 새천년의 소망을 가득 담은 행사들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런데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과거에는 새해였는데 올해는 한 해가 아니라 천년이다. 과거 우리조상들은 천년이 바뀌는 시기에 어떻게 했을까? 아니 백년이 바뀌는 시기에 어떻게 했을까? 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도 일년이 시작되는 첫날을 "설"이라 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성대한 축제를 벌이었다. 이러한 음력설 전통은 양력이 주도하고 있는 현재까지 조금도 움츠려 들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에게 가장 큰 명절인 "설"은 태양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모진 수난을 겪게된다. 1895년 태양력을 사용하게된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우리 말, 우리 글, 우리성과 이름까지 빼앗기고 민족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시기에 우리명절 또한 수난을 겪게 된다. 일본은 일찍부터 음력을 포기하고 양력을 받아들여 일제강점기에 우리에게도 양력을 강요하였다.
광복 후에는 양력을 기준으로 삼으며 양력설은 제도적으로 보장받아 공휴일로 지정되어 관공서나 직장인들에게는 양력설을 지내는 조금씩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양력설은 연말연시, 크리스마스 등과 어울려 정부와 사회상층주도의 연례행사와 그에 따르는 공공적이고 관변적인 풍속을 형성하여 왔다.
그렇지만 다수의 서민들은 제도적으로 양력설을 강요받지만 심정적으로는 음력설을 버릴 수 없어 양력설과 음력설을 이중으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설"은 양력과 음력을 동시에 지내는 기형적인 모습을 모였던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을 일부에서는 이중과세이며 세계화 추세에 뒤떨어지는 행위라 하여 음력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여 왔다.
이렇게 우리민족에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설"은 일제강점기에는 우리설과 일본설로 방황하다가, 해방 후는 이중과세와 세계화 속에 방황하다가 1985년 명칭도 어색한 "민속의날"로 바뀌며 공휴일로 지정되어 방황을 거듭하게 된다. 그후 1989년 음력1월 1일을 전후하여 3일간을 공휴일로 지정하며 확실히 우리의 "설"을 되찾게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되며 도시의 인구 집중화를 만들어냈으며 이에 따른 풍속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과거 농업사회에서는 일년주기로 생활해온대 비하여 현대인들은 년, 월, 주의 생활을 하게된다. 그러면서 주말과 공휴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설이 공휴일 일 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공휴일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대에는 명절도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설이 공휴일로 지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설과는 차원을 상황이 다르다. 결국 국민들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정부에서 음력설에 즈음하여 3일간을 공휴일을 지정함에 따라 종래 양력과세를 하던 사람들이 대거 음력과세로 되돌아오며 우리의 음력설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법이나 제도가 관습을 앞지르지 못하는 바와 같이,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민족혼이 깃들어 있는 설의 본질적 내용과 의미가 양력설에 곧바로 대체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적으로 양력과세를 유도하더라도 이미 관습화되고 문화화된 음력설의 강인한 전승력을 억제할 수는 없는 민의가 반영된 것이 현재 우리의 음력설이다.
전통적으로 전라북도에서도 정월 초하루부터 정월보름까지 15일 가량은 일년 중 가장 신성한 날이며 또한 축제기간이었다. 설날에는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친척과 이웃끼리 세배를 하며 그 후부터 각종 널띄기, 연날리기, 쥐불놀이, 이웃마을과의 돌싸움 등 겨울놀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초삳날에서 대보름까지 집안이나 마을의 각종 신들을 섬겨 동제를 지내고 쥐불놀이, 줄다리기, 지신밟기를 하며 놀았다. 설이 이러한 의례와 놀이의 시작이다.
이러한 각종 의례와 놀이는 대보름에 절정에 달한다. 설날에는 차례, 세배 등을 통하여 선조와 후손, 손윗사람과 손아랫사람들끼리 혈연중심의 상하관계에 따른 종적인 체계와 혈연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한다. 십이지일(十二支日)로 연결되는 보름에는 마을신에 대한 제의를 통해 마을공동체로서 이웃간의 횡적인 유대, 사회적 통합, 지역적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쪽으로 설 명절의 의미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여 간다.
이렇듯 설에서 보름까지의 명절은 혈연에서 지연으로, 종적상하 관계에서 횡적공동체 관계로 확대하며 자신과 공동체구성원의 귀속의식과 정체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전통적인 설은 상하관계와 이웃관계, 혈연의식과 지연의식을 다시 가다듬어 생산을 촉진하고 사회를 결속시키고, 소속을 재확인시켜주는 기능이 잘 나타나는 명절이다.
농촌의 자식들이 도시로 진출하게 된 60년대 이후 설은 멀리 두고 온 고향산천을 찾아 조상을 뵙고 제사를 받들며 그리던 부모형제, 이웃과 친지들의 체온을 느끼는 기회이다. 그래서 "설"에는 "민족의 대이동"이 이루어져 전라북도의 마을마다 고향을 찾아온 사람과 차량으로 넘치게 된다. 오랜만에 마을도 시끌벅쩍해진다. 고향에 오면서 보너스로 각종 선물을 사고 오래간만에 부모에 효도를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농촌에 계신 부모들이 설이 더욱 기다려진다. 꼬마들도 세뱃돈을 받고 재미있게 하루를 지낼 수 있어 설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그래서 고속도로에서 8시간씩 보내더라도 고향을 생각하며 차에 가득 실은 선물 꾸러미 속에 담긴 우리의 마음은 가볍기만 하다. 그러나 찾아올 자식이 없는 노인들이나, 고향을 찾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은 서글프기 그지없는 것이 또한 설이다. 그리고 전주 등 도시에 사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연휴를 맞아 스키를 타러 또는 해외여행을 갈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종진 (우석대 국악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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