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완연히 봄기운이 돈다. 새싹이 돋아나고 여기저기에서 꽃망울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요즘 바람이 좀 쌀쌀해서 약간 춥기는 하지만 드디어 봄은 왔고 4월이 됐다. 4월이 되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1919년 4월 4일 익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본래 익산에서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의 박영진이 중심이 되어 3월10일에 봉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핵심인물이 구속되었고 시위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만세운동의 열기는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익산지방의 최초 교회 중의 하나인 남전교회 교인들과 여기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들이 중심되어 4월 4일에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놀란 일경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 문용기, 박도현, 장경춘, 박영문, 서공유, 이충규 열사가 순국했다.
이때 활동했던 주요 인물중에 김병수가 있다. 당시 김병수는 세브란스 의전 학생이었다. 그는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을 만나 그를 도우면서 군산과 익산지방의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군산에서의 만세운동은 군산 영명학교의 은사인 박연세를 만나 진행시켰다. 그는 3월 5일 군산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했을 뿐아니라 서울의 제2차 학생시위에도 참여했다. 또다시 익산에 내려와 남전교회 최대진목사, 도남학교 문용기선생 등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갔다. 이때 그는 일경이 휘두른 흉기에 두부와 상체에 심한 상처를 입고 졸도했다.
그는 만세운동으로 구속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출감한 뒤 그는 남은 학업을 계속하여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군산에 있는 구암기독병원에서 일했다. 1922년에는 익산에 병원이 없어 삼산의원을 개설했다. 뿐만 아니라 후리교회(현재 우리제일교회)를 설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 교회는 고현교회의 설립자인 오원집과 김병수가 세웠는데 지금 큰 교회로 성장했다. 그는 사재를 들여 광희여숙이라는 여자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뒤떨어진 여성교육에 힘썼다. 그는 일제의 압박으로 민족사상이 쇠퇴해 가는 청소년을 위해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익산 YMCA회관을 건립했다.
해방 후에는 이리읍이 부로 승격되자 초대 부윤에 취임했고 6.25전쟁 중에는 구국총혁연맹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의사로서 시대적 사명을 다하다가 1951년 54세 소천했다.
/정옥균(전주금암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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