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축제가 무르익고 있는 전주 영화의 거리 한복판 아카데미 아트홀 영사실.
40여년의 세월을 영화와 함께 살아온 영사기사 이순우(李順雨·65·전북영사기사협회장)씨는 요즘 영사기앞에서 특별한 감회에 젖어있다.
예전처럼 10분마다 필름 롤(감이테)을 바꿔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강산이 4번이나 변하도록 내내 앉아있던 자리여서 다소 여유를 가질법도 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가 이처럼 노심초사하는 것은 한국영화의 한축을 담당했던 전주영화사의 산 증인으로서 잊혀진 영화사를 복원하는 현장에 있기 때문.
이씨가 영화인생에 발을 내디딘 것은 43년전인 1957년. 전주가 한국영화의 중심에 서 있을 때였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통해 돌아간 필름만도 무려 2천5백여편.
완주 봉동이 고향인 그는 첫 직장인 백도극장(현 일도문고 자리)에서 오스카,코리아,코아극장을 거쳐 이 극장 기술상무를 맡기까지 줄곧 전주에서만 영사기를 돌렸다.
“50∼60년대에는 필름도 자주 끊겼지만 무엇보다 가연성 필름이어서 화재예방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씨는 백도극장 사장과 부장으로 일하던 김영창씨, 이강천감독의 영향으로 아리랑과 성벽을 뚫고,선화공주등의 제작현장에서 조명일을 맡았다.
“60년대 극장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도내 극장수만도 45개에 이르렀고 관객들로 가득찬 공간을 가로질러 영사기를 돌릴때면 일할맛이 절로 생겼고요”
안방극장시대와 컬러TV,비디오 보급이 연이어지면서 영사기사로 일하겠다는 지원자가 자꾸만 줄어드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최근 영화계의 화두인 스크린쿼터제에 대해서도 그는 할 말이 있다.
“의무 상영일수를 채울만큼 한국영화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수준높은 영화를 양산,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과제가 아닐까요”
막바지 열기를 더하고 있는 영화제의 스포트라이트는 번번이 무대로만 향하고 있지만 그는 묵묵히 스크린을 향해 그 보다 더 밝은 빛을 쏘아댄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이 그의 능숙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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