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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풍자문학 개척한 채만식 작고 50주기

-'암울했던 민족의 자화상' 탁류로 남겨놓은 문학적 발자취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 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많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 옳게 금강이다. -중략-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화르르 쏙아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가 백릉(白菱) 채만식(蔡萬植, 1902-1950). 그는 우리나라 문학사에 있어 풍자문학을 개척한 독보적인 작가다. 각박한 삶속에서 가난과 도덕적 황폐가 가져온 비극적 양상을 통해 추락한 도덕적 가치관과 민족의식을 고발했던 그가 고향에 갖는 애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고향 군산을 통해 일제의 흥청망청한 상권의 이면에서 상대적인 빈곤과 황폐한 삶을 안아야했던 민중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풀어헤쳤던 채만식이 작고한지 50주년을 맞았다.

 

48년 생애동안 87편의 소설과 28편의 희곡을 비롯해 산문 평론 필 등 3백45편에 이르는 작품을 남긴 그의 대표작은 역시 장편소설 「탁류」지만「태평천하」나「금의 정열」등도 그의 문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빼어난 작품들로 꼽힌다. 1930년대 군산의 자화상이라해도 좋을만큼 당시의 사회상과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 해낸 ‘탁류’는 우리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서 뿐 아니라 군산의 아픈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소설이다.

 

사실 채만식은 군산이 있어 존재하지만 군산은 또 채만식이 있어 더욱 빛난다. 동서고금을 통해 작가의 고향은 단순히 공간적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고 신비스러움의 대상으로 다가서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러나 채만식은 오랫동안 고향에서 각광받지 못했다. 그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작고한 이후 10여년이 지났을때.

 

1963년 6월11일 군산시청 회의실에서 열린 「채만식 선생 추모 문학의 밤」이 그를 기억하는 첫자리였다.

 

지금 채만식의 흔적은 군산 곳곳에 남아있다. ‘탁류’의 배경이 된 째보선창과 소설속 공간들에 소설비가 세워져 있고, 월명공원에는 1984년 문학비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서정상·당시 전북일보 사장)가 세운 문학비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군산시 임피에 있던 생가는 이미 없어져 버렸고 말년에 지병을 치료하며 마지막 생을 맞았던 옛집 또한 보존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지역에서는 90년대 중반이후 기념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 96년, 이병훈시인(당시 군산문화원장)을 비롯한 지역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한 채만식 문학관은 옹색하기는 하지만 채만식 선생의 육필 서간문을 비롯, 사진, 연보판 등 4백여점의 각종 자료가 전시돼 이곳을 찾는 문학동호인들에게는 그를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되고 있다. 한때 문학관을 찾거나 작가의 고향을 찾는 사람은 전국에 걸쳐 매년 1천3백여명에 이르렀다. 그만큼 작가와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큰 덕분이다.

 

군산시는 채만식 서거 50주년(2천년)을 맞아 금강하구둑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다. 탄생 1백주년(2002년)에는 그의 문학과 생애를 한곳에서 고스란히 만날 수 있게 하겠다는 의욕이다.

 

지역 문학계가 기념사업에 의지를 보태고 나선 움직임과 함께 문인협회 군산지부는 기일인 11일 오전 11시 군산시 임피면 취산리 그의 묘소에서 50주기 추모제를 지낸다. 한국문학사의 중심에 섰던 그의 문학을 기리고 고향 군산과 함께 그를 기억하고자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다.

 

◈ 채만석 선생 그 삶의 시간

 

채만식선생 은 1902년 6월 17일 군산시 임피면에서 출생했다.

 

임피보통학교와 서울 중앙고보를 졸업했으며 와세다대 부속 고등학원에 입학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1925년 단편 ‘세길로’조선문단의 추천을 받았으며 그 이듬해에 조선일보 학예부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32년에 다시 개벽사 기자로 입사했으며 1934년 조선일보에 ‘인형의 집을 나와서’를 연재했다. 같은해에 대표작중의 하나인 단편 ‘레디메이드 인생’을 발표, 주목을 받았다. 36년에는 단편 ‘심봉사’를 문장지에 발표했지만 총독부의 검열로 전문이 삭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조선일보에 장편 ‘탁류’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1939년 장편 ‘천하태평’ 발표하는 등 활발한 발표활동을 했으나 1945년 일제의 탄압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귀향해버렸다. 그런중에서도 중편 ‘민족의 죄인’‘허생전’등을 발표했다. 건강이 악화된 투병생활을 했던 그는 폐질환으로 50년 6월 11일 6.25사변이 터지기 2주일전에 세상을 떴다. 채완성하지 못한 장편 「소」를 남기고.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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