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 지휘부가 동학농민군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들이 국내에 처음 공개하는 이노우에 가쓰오 (井上勝生)교수.
1일과 2일 열리는 동학농민혁명 1백7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연구자다. 그는 ‘일본군에 의한 동학농민학살’을 주제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5만명 이상 학살됐으며, 3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당시 일본군의 군사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밝힌다. 게다가 일본의 동학농민군 토벌은 조선 정부의 허가도 없이 대량 살육한 국제법 위반이며 일본군 지휘부 역시 국제법 위반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기한다.
지난 95년 일본 북해도 대학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 유골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일본 방위청과 외무성 관련사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미공개 사료가 상당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알고 박맹수교수(영산원불교대학)와 함께 최근까지 사료조사를 벌여왔다.
이번에 발표되는 논문도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산하 도서관에서 당시 일본군 진압부대의 문서를 대량 발굴,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
그는 “95년 진상조사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으며 사실확인을 위해 외무성과 방위청 사료를 조사하면서 동학농민군에 대해 일본이 명백한 살육행위가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새로 발굴된 자료는 동학농민군 진압의 주축부대였던 후비보병 제 19대대와 기타 지원부대의 작전일지, 전투일지, 일본 히로시마 대본영(일본군 총지휘부)에 보낸 보고서 등 1백여종으로 당시 학살행위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이노우에교수는 1894년 10월27일 일본군 총지휘부인 히로시마 대본영으로부터 내려진 ‘살육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일본군의 작전일지에 ‘동학당(동학당)에 대한 처치는 엄렬(嚴烈)을 요함. 모조리 살육할 것’이라고 기록돼 있고, 인천에 있던 병참사령부의 기록에는 ‘참살을 실행하라’고 돼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대규모 무력진압의 핵심부대인 후비보병 19대대가 일본의 시코쿠지방 에히메현 등 4개현 출신병사들로 구성돼있음을 최근 확인했다며 이 지역의 사료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일본의 동학농민군 토벌은 한국내에서조차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지만, 이노우에교수의 이번 논문은 일본의 동학농민군 살육행위에 대한 국제법적인 관점에서 부당성이 제기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방위청 관련 사료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물론 지도부의 동태, 처형당한 인적사항 등도 기록돼 있다”며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일본내 사료발굴작업에 대한 지속적인 의지를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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