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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金炳魯 생가터



 

‘萬人 가운데 하나를 만나기도 어려운 것인데/그같이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으로/모든 겨레의 흠앙속에 살다가 가신 이/한 분 계셨으니/街人 金炳魯선생 그 이시다…’ 서울북한산 및 수유리에 안장된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선생의 묘비명(墓碑銘)중 한 구절이다.

 

흔히 근대 사법 1백년 역사상 ‘법의 정의’와 ‘사법의 양식’을 확고하게 다진 법조계 큰 별로 꼽히는 가인 김병로(1887∼1964)는 ‘확류와 더불어 마주 싸우며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풍운이 감돌던 구한말 순창군 복흥면 하리 사창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대학과 명치대 법과에서 수학했으며 일제하 변호사로 개업한후 식민지배에 고통받는 동포와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또 당시 지식인들의 결성체인 신간회(新幹會)에도 참여하여 민중 계몽운동과 독립투쟁에 직접 나서기도 했었다.

 

해방후 초대 대법원장으로 선출돼 사법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독재에 맞서 사법부의 권위를 지켰으며 ‘법관을 독립하여 재판하는 것인만큼 이는 대법원장으로서도 간섭하거나 지시할수 없는 것’이라며 이박사의 압력을 당당히 뿌리친 일화는 지금도 법조계에 회자된다.

 

흰 고무신에 두루마기, 지팡이 차림의 말년 그의 모습은 청빈과 근엄의 상징이었으며 ‘법관은 굶어 죽더라도 재물을 탐하지 말고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끝까지 실천한 사회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 가인선생의 순창 생가(生家)터가 고향에서조차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딱한 소식이다. (5일자 16면)

 

생가터 입구에 안내표지판 하나가 달랑 서 있을뿐 어디에도 가인의 숨결을 읽을수 있는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4월15일 군민종합복지회관내 한켠에서 개관된 기념관조차 자료가 부실하고 일반 관람객마저 출입이 어렵게 돼있다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수 없다.

 

전주시 덕진동의 호반공원에 ‘법조3성’의 한 분으로 가인의 흉상이 세워져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수는 없다. 전북 출신 선각자를 기리고 흠모하는 일은 후학(後學)이나 도민 모두의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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