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에는 쓸모없는 나무의 유용함을 내세워 행복과 불행에 대한 상대적 관점을 일깨워 주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우리집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저’라 부르네. 그 밑동은 흙투성이라 먹줄을 댈 수가 없고 그 작은 가지들도 꼬불꼬불해서 규구(規矩:캠퍼스와 자)에 맞지를 않네. 그것이 길가에 서 있으나 목수가 돌아보지도 않네. 지금 그대의 앎음이 나무와 같아 커도 소용이 없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을 것일세.”
장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자네는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데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만 왜 그것을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낙토, 곧 이상향)인 광막한 들에다 심어 놓고 그 곁을 방황하면서 무위로 날을 보내고 소요하다가 그 밑에 드러눕지를 않는가? 그 나무는 도끼에 베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아무에게도 해를 입힐 염려가 없네. 쓰일데가 없으니 또 무슨 괴로움이 있겠는가?”
곧고 크게 자란 좋은 나무는 사람들이 쓰려고 서로 베어가기 때문에 오래 살지도 못하지만, 비틀어지고 볼품없는 나무는 베어가는 사람이 없음으로 장수를 누리며 살고 후에 그 큰 그늘로 많은 사람을 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인 것이다.
한번 꼬아서 만든 뫼비우스 띠처럼 자연은 겉이면서 안이고, 안이면서 겉인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시작과 끝이 한 점에서 만나는 이치를 보여주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이 노래한 자연은 이런 상대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지상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은 어둠속에서 아름답게 빛난다.
인간은 지상에서 그 별을 동경하며 그 별에 떠있는 하늘을 천국이라 한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 보면 그곳에는 또 다른 낙원이 있다.
집집마다 켜있는 불빛과 가로등이 어둠속의 별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지상이 곧 천국이 되는 것이다.
높은 콘크리트 빌딩과 자동차의 소음, 그리고 매연으로 제 색을 잃어버린 하늘 저 너머에 아직도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자연이 숨쉬고 있음을 상기하며 힘든 여름 건강하시길 기원드린다.
/ 조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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