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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새해 아침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 - '심호흡하며.. '



'심호흡하며 하얀 설원을 걷자'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너나 없이 꿈을 얘기하고 희망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12월이 되어 해가 저물게 되면 어느새 새해의 꿈과 희망을 접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달력의 첫 장을 넘길 때는 무언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이 되었다가도 그 마지막 장을 닫을 때에는 힘이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생자체가 희망과 낙망 사이, 꿈과 좌절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쨋든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이 험한 세상 속을 걸어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이르러 다시 새해를 맞았다는 사실은 여간 감격하고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성서에는 ‘에벤에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여기가지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생각해 보면 히브리민족 뿐 아니라 우리도 오늘 여기까지 이르러 2002년을 맞게 된 것이 우리 힘으로 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커다란 손길과 선의 (善意)에 의해 우리의 발걸음이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새해가 되었다고 턱없이 희망에 들뜨거나 해가 저물었다고 힘 빠져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우리 앞에 펼쳐진 또 한해의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바라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달력의 첫 장을 넘길 때면 나는 늘 아무도 걷지 않는 하얀 설원을 연상하곤 합니다. 흰눈이 소담하게 덮힌 일년이라는 시간의 설원을 말입니다. 그 시간의 설원을 앞에 두고 보면 저절로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야할 그 길 앞에서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되돌아보고 싶지 않지만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말할 수 없는 회오와 슬픔에 가슴을 치게 됩니다. 아무렇게나 걸어온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차마 민망하여 고개를 돌리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제발 올 한해를 지내면서 되돌아 본 한 해 만은 또 그렇게 어지러운 발자국이 아니기를 기도 해 봅니다.

 

우리 앞에 다시 시간의 설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잘 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 할 것 없이 신은 우리에게 다시 시간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자!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저 하얀 설원을 우리 함께 걸어가도록 합시다. 올해만은 우리의 발자국들이 생명과 시간을 주신 이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해 봅시다. 

 

/ 김병종 (화가, 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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