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좀 빨리 나올 수 없어요? VIP 손님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 방송국 사모님 있잖아요, 그 분하고 삼거리 식육점 사모님이 기다리고 있어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주인 여자는,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열리는 문을 통해 탕 안의 여자들이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우정 소리를 높인다. 늦은 내게 짜증을 내고 싶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그녀의 가장된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냉랭함이 위태롭게 섞여있다. 여자의 속셈이 환히 들여다보이지만 나는 시치미를 떼고 조금 황망한 몸짓을 하며 그녀 앞을 지나친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습하고 끈적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는질는질 떠도는 나른한 수증기의 입자들에 감염되어 내 몸은 연체동물처럼 되고 말 것 같다. 하지만 동공은 재빨리 어두운 실내 환경에 적응한다.
늘 그렇듯이 사우나실에는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꿈결처럼 고요하게 들앉아 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처럼 정말 그네들의 삶은 꿈같이 달콤하고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밝고 건강한 가정, 적당히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 그걸 즐기는 안목까지 갖추었다면 불행할 이유가 없잖은가.
그런데도 저들은 무엇을 위하여 염천의 무더위에 살갗이 발갛게 익는 고통을 참아내며 답답한 저 인갑(人匣) 안에 갇혀 있을까.
꿈같은 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고통쯤은 얼마든지 견뎌내야 하는 것일까.
하긴 아름다운 육체는 아름다운 삶을 위한 기본 요건이 되기도 할 테니까. 갑자기 그들 중에 어느 여자가 파안대소하며 웃는 몸짓이 보인다. 찰나의 시간을 두고 다른 여자들도 옆 사람의 알몸을 쳐대며 자지러질 듯 웃어댄다. 정물처럼 죽어있던 사우나실 안의 분위기가 꿈틀 살아난다.
두 여자가 동시에 나를 향해 오고 있다. 한 여자는 사우나실에서, 한 여자는 냉탕에서 나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다. 자신이 먼저라는 뜻이다. 종종 순서 다툼에서 그들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곤 한다. 때를 미는 순서 정하기가 마치 자신이 지닌 명예나 부에 따라 결정되기라도 하듯 그들은 사뭇 심각하다.
그래서 내 말의 사소한 뉘앙스 차이에도 그들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때로는 다른 목욕탕으로 옮겨가 버리는 것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분풀이를 하지만, 수건이나 비누 화장품 등속이 담겨있는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가 자리를 비우면 대부분 그 책임은 내게 전가된다.
좋은 팔자를 타고난 그들에게 그 정도의 권한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도 젊은 주인 여자는 결코 내게 아량 따위는 베풀지 않는다. 그 나이에 어쩌면 그리 암팡지게 장삿속을 훤히 꿰고 있을까 싶게 그녀는 이악스럽다.
단골이 떨어져 나가는 이유가, 가령 시설 좋은 불가마 온천이 생겼다거나, 다른 목욕탕에 비해 탕 안의 시설물이 취약한 데 있음에도 그녀의 눈총 세례는 내게 매몰차게 쏟아진다.
마침내 덩치 싸움에서 이겼는지 아니면 방송국 차장 부인이 점잖게 양보를 했는지 모르지만 식육점 여자가 오늘의 첫 손님이 되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뱃살을 움켜쥐고 비둔하게 다가와 내 앞에 엎드리자 부실하게 짜 맞춘 침대의 다리가 휘청인다. 보통 여자의 두 배쯤이나 되는 등판이나 엉덩이가 그녀의 식육점 진열장에 걸린 고깃덩이 같다.
얼마나 많은 소나 돼지의 육신이 그녀의 손에 의해 난자질 당했을까. 온몸에 전율이 인다. 나는 마음을 모질게 다잡고 때수건을 바투잡아 전장에 나가는 용사처럼 제법 비장하게 달겨든다. 볼록하게 살이 오른 목에 첫 손길이 가는 순간 비로소 몸뚱이와의 전쟁은 시작되고 내 삶도 하루의 깃발을 올린다.
여자의 등을 밀고 팔과 다리와 허벅지와 은밀한 곳 주변까지 밀어주고 나서 나는 그녀의 손등을 탁탁 친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반응이 없다. 잠깐 무춤거리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녀의 손등을 다시 두드리며 돌아 누우세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마지못해 돌아눕는다. 내가 보내는 손등의 신호에 대해 탐탁찮다는 반응이다. 그렇지 않으면 잠이 든 것도 아니면서 내 신호를 무시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한 번쯤 내 신호를 거부함으로써 때밀이에게 자신의 위상을 높여보고 싶었던 것일까.
때밀이 주제에 손님 앞에서 늘 당당한 내게 그런 방법으로라도 자신의 의도를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가끔 있는 일이긴 하지만 목욕탕의 때밀이를 자신의 몸종같이 부리고 싶어하는 마나님이 있다.
그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간 십중팔구는 화를 낸다. 말로 할 것이지 건방지게 왜 사람의 손을 툭툭 치느냐고 호령을 한다. 오십대의 어떤 중년 여자는 내 수신호를 완전히 무시한다. 말을 하지 않으면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에겐 작은 사회에 대한 어떤 규칙도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지닌 가치나 행위에 맞춰 그곳의 방식이 따라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가끔 고소해 할 때가 있는데, 아무리 손등을 쳐도 반응이 없는 경우이다. 이들은 때를 밀어본 경험이 없어서 진실로 수신호의 의미를 모른다. 그들은 오히려 뜨악한 표정으로 내게 이유를 묻기도 한다.
그녀들이 내 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남편과 나 사이에도 소통되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네들처럼 애써 신호의 의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언제부터인지 그는 가정에서의 일상에 조증을 드러냈고 자신만의 생각에 몰두해 있곤 하였다.
그는 꿈을 자주 꾸었으며 소스라쳐 놀라는 그에게 다가가면 왠지 버성긴 태도를 보였다. 그런 시간이 한동안 지속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게 등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런 것들이 모두 그가 내게 보낸 신호였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남편은 내게, 내가 그녀들에게 보내는 신호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의사소통을 하고 싶어했다. 그걸 해독해내지 못한 나 자신만 날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할 뿐. 인간에게 몸짓의 소통은 언어적 소통보다 더 근원적일 수 있다는 걸 나는 잊고 있었다.
그녀는 뒤집지 못하는 풍뎅이처럼 버둥개질치며 가까스로 배를 드러내 눕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조소를 금치 못한다. 탄력을 잃어가는, 고목 마냥 딱딱해지는 굵은 목을 밀고 닿기조차도 혐오스러운 큰 가슴을 밀어주며 몇 명의 아이가 집을 짓고 열 달 동안 살다 나간 배에 이르렀을 때, 지렁이가 기어다닌 자국처럼 터졌던 살갗이 한갓 비계덩이로만 보여 비위가 상한다.
이럴 땐 생명을 잉태해낸 어머니도 위대하지 않다. 탐욕스러운 한 인간으로 존재할 때의 여자는 결코 위대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욕망에 꿈틀대는 동물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손에 엉겨붙은 때를 털어내며 온수용 수도꼭지를 튼다.
조금 뜨겁다 싶은 물을 떠서 누워있는 그녀의 몸에 끼얹었다. 때와 함께 흘러내리는 물을 훑어내고 지압을 하려다가 나는 문득 도발적으로 고개를 쳐든 그녀의 유두를 보았다. 뜨거운 물이 자극을 주었을까. 나는 선뜻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한다.
때밀이로써 누구에게나 하듯 그녀의 전신을 스쳤을 뿐인데도 여자의 감각은 유별나게 반응해서 나는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짧은 혐오감이 스쳐간다. 그녀를 이렇듯 능멸하는 이유가 뭘까. 현재의 내 정수리에 깊이 틀어박혀 있는 피해의식 때문인가, 아니면 가진 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까. 행여 촉수 높은 그녀의 더듬이에 능글차지 못한 자신이 걸려들까 싶어 탕 밖으로 나가 냉수를 들이킨다.
떠다니는 수증기의 올올한 입자들이 작은 유리창을 통해 침투하는 아침 햇살 밑으로 몰려 있다. 사선으로 뻗친 빛 주변을 제외한 목욕탕 안의 사물들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흐릿한 시야를 바라보는 것은 명료하지 않아서 숨통을 틔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아무 두려움 없이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같아서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바깥 세상에서 일하며 엉켜온 어떤 종류의 때도 이곳에서는 그 형태와 의미를 구분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의 몸에 붙어있는 같은 때일 뿐이다. 이 공간과 나는 더럽혀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때 신명을 바쳐 일을 하게 된다.
하루의 때를 말끔하게 벗어내고 저 유리문을 열고 나서는 사람들의 윤기 흐르는 살색과 표정을 보며 내 하루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닌 기쁨이나 슬픔 따위도 이 흐릿한 공간에서는 모두 은닉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손과 발을 맛사지 하며, 굳은 어깨의 근육을 풀어주며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을 발견한다.
벗은 몸은 모두 같아서 구별되지 않을 것 같지만 나는 그들의 몸을 만지며 신체의 사용 부위나 감각이 발달한 것으로 직업을 가늠하고, 나를 부리는 행위에서 그들의 귀천을 분별해낼 줄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귀한 척 해보지만 내재되어 있는 그들의 천박성은 금세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숨겨져 있는 어느 정도의 허위가 있다고 단정한다. 사우나실의 저 여자들 중에도 그런 부류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 중에 가장 부러움을 많이 받고 있는 의원 댁만 해도 그랬다.
선거철이나 공개석상에 나타날 때에 그녀는 남편 옆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웃고 있지만 사실 그 부부의 불화 정도가 심각하다는 소문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툼박한 식육점의 저 여자, 가끔씩 내게 때밀이의 비애를 느끼게 하는 잔망스러운 인간이기에 그녀를 능멸한 적도 있지만, 이웃 노인들에게는 자신의 푸짐한 살집만큼이나 넉넉하게 고기를 떼어준다고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듯 나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체득하였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평정을 되찾는다. 어쩌면 어머니의 자궁에서 막 빠져 나왔을 때처럼 평등한 무욕의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물살을 받아들이면서 몸으로 입고 마음으로 입어야만 했던 실답잖은 옷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인간이란 몸피듬에 둘러진 가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인정받으면서 살아가는 동물이니까. 그 굴레를 과감히 벗어 던졌을 때 사람은 저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본성까지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탕 안에서의 사람들이 마음을 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한 발짝만 다가가도 그들은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서 가슴을 풀어헤쳐 준다. 격식을 갖추고 감출 것이 많던 곳에서는 내보이지 못할 것 같은 자신만의 켯속을 한 껍질 한 껍질 벗겨내는 것이다.
바깥 세상에서는 결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인간의 진실을, 나는 불명료하고 흐릿한 이 공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수족처럼 가까이서 살던 남편에게서는 찾지 못했던 것들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남자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유일하게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는 내 자부심만큼이나 강한 그의 거부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그토록 하찮은 존재밖에 되지 못했는가.
밤이면 귓볼을 간지럽히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말들이 아직 귓바퀴를 맴돌고 있는데 그는 이미 떠나 버렸다. 그와 몸을 섞고, 그의 몸을 어루만지며 열락에 들뜬 시간들이 한갓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자각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했다.
부드러운 혀로 그의 몸뚱이의 세세한 부분까지 핥으면서 그는 내 것이라는 충만감에 전율하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나는 그에 관해서 저 식육점 여자의 진실만큼도 알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냉철한 이성보다 더 강하게 작용해서 평정을 찾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냉탕 앞에 서서 나는 심호흡을 한다. 찬물을 떠서 세수를 하고 마음을 옹송그려 다시 한 인간의 삶을 더듬어가기 시작한다.
부지사의 아들 내외는 잘 살고 있다더라. 그 애가 너보다 잘난 게 뭐가 있다고. 그 생각만 하면 이 에미는 혀를 깨물고 싶다. 4학년 가을에 네가 발레 콩쿠르에서 입선했을 때 그 집에서 선이 들어왔잖니. 너 그때 뭐라 했는지 기억하니? 엄마, 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였어. 그런데 지금 너 사는 꼴이 뭐니? 너를 생각하면 내 억장이 무너진다.
이사온 지 열흘만에 직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집들이를 해야 했다. 몇 가지 음식을 준비하며 집안을 살피다가 커튼이 너무 낡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떼어버리자 너무 허전해서 궁여지책으로 블라인드를 치게 되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부장님은 어떤 집에서 살까 궁금해하더라는 남편의 말을 들었을 때 미리감치 눈치를 챘어야 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쳐들어온 직원들은 실망의 표정을 애써 감추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머, 사모님 감각은 아주 세련되셨군요. 커텐 대신 블라인드를 친 것으로 보아 검소하시기도 하구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블라인드 친 것을 후회하였다. 커텐이든 블라인드든 나는 왜 그것들을 집안에 드리워서 그늘을 만들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을까.
내게는 블라인드일지라도 의지할 그늘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다지 넓지도, 밝지도 않은 거실에서 살면서도. 송부장님 거실에는 천경자의 그림이 걸려 있던데요. 대학 때 친구가 그려준 유화 앞에서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나는 과일을 내오겠다며 부엌으로 갔다.
사과를 깎으면서도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천경자의 그림을 걸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을까. 어느 결에 나는 그런 생을 욕망하고 있었음인가.
그날 남루한 집안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얼마나 방자하게 굴었는지 그들이 돌아간 후부터 나는 블라인드를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킨 자괴감이 나를 한층 더 어두운 곳으로 은폐시키고 말았다.
내 삶을 아무리 성실하고 정직하게 갈무리 해왔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그들이 지닌 잣대로 내 삶을 재단하려 들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작고 초라한 내 집에서는 손님을 치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내 집에 들인다는 것에 두려움이 생겼다. 심지어는 블라인드 자락 사이로 실핏줄 같은 햇살이 새어들어 오는 것만 봐도 그 빛이 내 속옷까지 뚫고 들어와 나를 잠식해 버릴 것만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능력이나 노력이 비슷하다 해도 삶의 질량은 천차만별인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남편만 해도 그랬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의 힘으로 출세를 해야 했기 때문에 사적인 일은 모두 내게 떠맡기고 회사의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나마 부장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무서운 집념의 성과였다. 그러나 천경자의 그림을 갖고 있는 자제과의 송부장은 하루의 반나절을 골프장에서 보내면서도 남편보다 나은 대우를 받고 있다.
그가 부하 직원들의 비난을 받긴 하지만 사장의 계산된 총애는 변함이 없다. 송부장 부인이 사모님을 찾아가 정치 경제계의 뉴스거리를 전하며, 그녀가 선물한 진주 목걸이가 사모님의 품위를 한결 더해 준다는 교태 섞인 찬사를 늘어놓을 때, 나는 남편의 구두에 광을 내기 위해 콜드크림을 바르면서도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토록 미욱스런 그에 대한 긍지가 내 운명을 추락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 할머니 좀 씻겨 주세요. 냄새가 나지 않도록 바디샴푸를 잔뜩 사용 하시구요.”
교양 있는 말씨와는 다르게 노인을 대하는 젊은 여자의 행동은 방자하다. 그녀는 마치 흉물스런 짐승을 넘겨주듯, 앞세우고 들어온 노인을 내게 맡기고는 도망치듯 사우나실로 들어간다. 아는 사람을 만났는지 손짓을 하며 웃는 얼굴이 흐릿한 수증기 사이로 괴기하게 느껴진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할머니를 모셔오는데 노인에게서 냄새가 나서 못 살겠다는 여자다. 노인의 몸에서는 국적불명의 냄새가 난다. 이 향수 저 향수를 어찌나 뿌려댔는지 근원을 알 수 없는 냄새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새댁을 경멸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녀는 내 단골이기 때문에. 그녀는 올 때마다 고맙다는 이유로 내게 팁을 준다. 나는 그녀가 내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는 것을 안다. 어느 손님보다도 나는 할머니의 몸뚱이를 정성 들여 씻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거짓 웃음을 웃으며 받은 그 돈을 밤이면 동전까지 모두 들고 아파트 꼭대기 층에 올라가 유리창을 열고 던져버렸다.
“할머니, 돌아누우세요.”
깜빡 잠이 들었는지 노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남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도 잠이 들만큼 노인의 감각은 둔해져 있다. 세월의 더께가 쌓일수록 점점 두꺼워지는 굳은살의 무딘 감촉이 타인의 손길조차 감지하지 못하게 변화시킨 것이다.
검버섯 투성이인 노인의 살갗을 닦아주며 나는 문득 슬픔이 치솟는다. 노인이 내 손을 뿌리친다. 몰려오는 잠을 물리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싫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굴어."
짜증이 섞인 노인의 낮은 목소리에는 윤기가 묻어나지 않았다. 노인의 삶이 그러하듯 그저 공명된 쉰 소리일 뿐이다. 노인도 내 나이였을 때에는 서슬진 목청으로 누군가를 호령하며 늠연하게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할머니가 한 생을 갈무리할 이 즈음 가족들로부터 저런 대접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꿈엔들 했겠는가. 헝클어진 백발, 구부듬한 허리, 웃을 때마다 슬픔을 자아내는 합죽한 입매, 이제 어떤 의사 표시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세월의 끝자락 앞에서 노인은 한갓 사육 당하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뛸 수도 포효할 수도 없는, 겨우 목숨만 연명해 가는. 나도 언젠가는 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짧은 회한이 스쳐간다.
"아이구, 시원해. 옳지옳지. 거기를 조금만 더 두드려주구려. 내가 오늘 호강을 하는구먼."
목덜미에서부터 지압을 해 내려갔더니 노인이 모처럼 반응을 보인다. 애완견은 품고 다닐지라도 노인의 쪼그락진 살비듬은 닿기조차 싫어하는 손주며느리이니 언제 어깨 한 번 주물러 드렸을까. 사람 대접을 받았다고 기분이 좋아진 할머니의 합죽 웃음을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젊은 댁은 쑥찜탕과 냉탕에 번갈아 다니면서 연신 땀을 흘리고 있다. 인어처럼 예쁜 몸뚱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고통은 기꺼운 것이리라. 그렇게 발악해서 살을 빼지 않아도 할머니 몸을 한 번 씻어주고 나면 그 이상의 에너지가 소비될텐데.
마흔 넷, 저 노인과 젊은 여자의 중간 지점에 나는 서 있다. 내게도 젊은 댁처럼 무르익어 터질 듯한 피부를 지녔던 적이 있었듯이 언젠가는 주름으로 물결을 이루는 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중간지점은 무엇을 의미할까.
세상과의 진정한 화해가 가능한 나이. 얽히어 있는 신경다발 같은 삶을 다소곳이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되는 나이라든가. 그런데 나는 세상을 향해 적대감을 쌓아올려 하나의 탑을 만들어 가고 있을 뿐이다.
그 탑은 너무 견고해서 폭풍으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삶이란 이런 것인가, 마흔 네 해의 세월이 삶 자체를 뒤흔들며 지나갔건만 아직도 나는 여전히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다글다글 들끓는 가슴을 움켜쥐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내 삶의 모습이라니.
어머니 말씀대로 따랐다면 나는 지금 춤을 추고 있을까. 그가 졸업 작품으로 발표한 내 춤을 보며 황홀해 할 때가 있었던 것처럼, 나는 크고 화려한 거실에서 관객이 없을지라도 가끔은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관객 없는 춤일지라도 춤을 출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춤을 출 수 없다. 움츠려 줄어든 이 작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슈즈 대신에 낡은 덧신을 신고, 백화점이나 수퍼마켙보다는 시장으로 달려다니면서도 그 시절에는 한 줄기 햇살 같은 그의 위로가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1년만 더 지나면, 이번 승진 기회를 잡으면 가정으로 돌아와 당신이 원하는 춤을 추게 해줄께. 부장만 되면 당신이 나를 위해 자신을 버렸듯이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위해 모든 걸 바칠 거야. 1년이 열 번, 스무 번이 다 돼가고 있다.
그 사이 나는 시동생과 시누이들의 뒷바라지로 허리 펼 날이 없었다. 결국 그들에게 내 삶의 태반을 소진하고 빈 들녘의 쭉정이가 되어 떨고 서 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가 눈빛을 빛내며 했던 그 때의 약속들이 결국은 허섭쓰레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때는 꿈꿀 수 있어 행복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뤄내야 할 꿈도 상실해 버리고 두께만 더해 가는 불신의 벽이 굳건히 버티고 있을 뿐이다. 왜 이렇게 몸이 무거워지는 걸까. 길고 험난한 길을 강행군한 것 같은 피로감이 엄습한다. 질량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력감이 온몸을 덮쳐온다.
아이들을 깨우려다 조금 더 재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실에 몸을 눕힌다. 온몸이 땅 속으로 꺼져들 듯 아득하다. 눈을 감자 별무리가 난무한다.
그 별을 좇아 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져들 것만 같다. 잠과 죽음 그리고 삶과 죽음이 혼효된 상태에서 나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바둥대다 깜빡 잠이 들었지 싶다.
뭔가 예리하게 눈을 찌르는 느낌에 소스라쳐 일어났다. 해가 떠올라 온몸을 휘감고 있다. 몸을 움직여 광망(光芒)을 피하고 싶지만 감전이라도 된 듯 꼼짝을 할 수가 없다. 그 눈부신 빛이 전신을 태워버릴 듯한 공포로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저걸 내려야 해. 두 팔을 깍지 끼우고 세운 무릎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나는 먹이를 포획하는 야생동물처럼 블라인드의 끈을 거칠게 잡아챈다. 햇빛이 사라지자 살 것 같다. 발작에서 풀려나듯, 오갈 들어 수축된 세포들이 이완되기 시작한다.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주변 사람들이 창가에 몰려들어 내려다보고 있는 환상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의심과 호기심을 가득 담은 두 눈의 초점을 내게 모으고 금방이라도 달겨들어 나를 해체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은 내게 뭘 원하는가. 이제 더 이상 나는 그들에게 줄 것이 없다. 남은 게 있다면 나 자신을 내놓는 일 뿐이다. 얽히고 설킨 그들의 음산한 숨소리에서 벗어나자 나는 진저리를 친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들은 악머구리 끓듯 더 극악스러워졌다. 그들은 너무 잔인하다. 내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가 껍데기만 남기더니 이제는 내 의식 속까지 파고들어 괴롭히고 있다. 남편조차 떠나버린 지금 나는 이제 그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들에게 저당 잡혔던 내 인생을 이제부터라도 되찾아야 한다. 시아버지의 칠순 잔치가 보름 뒤로 다가왔다는 전화가 벌써 몇 번째다. 이렇게 목을 조여오는 시간들이 길어지면 나는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을 것 같다.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등교하자마자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아직 태양이 열기를 뿜어내기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나는 검정 바탕에 잔잔한 꽃무늬의 양산을 펼쳐들고 그 그늘에 의지하여 걷고 있다.
며칠 전에는 양산을 놓고 나왔다가 길거리에서 경기를 일으킬 뻔하였다. 나는 빛이 싫다. 아니 무섭다. 목욕탕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대낮의 외출은 거의 하지 않는다. 건물 밖에 나서면 햇빛이 눈 속으로 파고들어 망막을 새까맣게 태워 버릴 것만 같았다.
333번 버스가 오자 나는 사냥꾼의 포획망에서 벗어나는 짐승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차에 오른다. 비로소 빛의 공포로부터 헤어난다. 10분 정도 버스에 앉아 제멋대로 떠오르는 상념들을 정리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 번 그가 먼저 머리 속에 자리한다. 의식 속에서 그를 삭제해 버리려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생각은 더 물끈물끈 치솟아 나를 괴롭힌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목표 지점에 도착하여 허둥지둥 내리기 일쑤였다.
버스가 주택가에 가까운 두 번째 정류장에서 멈춘다. 저만치 서 있는 신혼부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손을 잡고 있던 임신한 새댁이 남편의 넥타이를 가지런히 잡아주며 주변이 환해지도록 웃고 있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그의 옆에 있으면 세상 어느 것도 부럽지 않는 포만감을 느끼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도피행각은 비겁하다. 또다시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그에 대한 분노가 고개를 쳐든다. 내가 그를 얼마나 믿었었는지는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내 삶을 송두리째 쏟아붓고 길거리로 내몰린 심정이 이럴까. 그를 지나치게 신뢰한 내 어리석음이 문제라고 또다시 자학한다.
예기치 못한 그의 가출로 잠시 휘청거렸으나 나는 이를 앙물고 일을 시작하였다. 그에 대한 배신감이 크면 클수록 나는 자신을 더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자존심이 망가질 때마다 그를 떠올렸고 그러면서 내 안의 나를 죽여갔다. 내 안에서 들끓던 침묵들이 항변하는 날엔 때때로 손님의 등에 붉은 곡선을 만들기도 하면서 나는 앙바틈한 여자가 되어야 했다.
때밀이,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나는 어떤 것도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나를 추락시키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를 강구했다. 나는 아직 그의 아내였고 그는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 그가 짓는 얼굴 표정을 보고 싶었다. 진실이 아닌 것이어도 괜찮다. 아니, 그가 나로 인하여 실추된 체면을 복귀시키기 위하여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지가 궁금하였다. 결국 나는 내 생을 엉망으로 망가뜨린 남편에 대한 보복 심리에서, 그를 얼마만큼 철저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지켜보자는 몰악스러운 심산을 갖고 일을 시작했다.
그날 아침 출근길의 그의 태도를 기억해 내려고 애써보아도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태도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라진 그 주의 일요일 밤, 나는 침대에 눕다가 자명종 시계를 조절하며 시간을 보았다. 열 두시 이십분이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지각하지 않으려면 그만 자는 게 어때요? 짧은 사이를 두고 그의 대답 대신 바둑 해설자의 목소리가 귓결에 들려왔다. 바둑 해설하는 여자의 목소리치고는 꽤 낭창낭창하다는 생각을 했던가. 밤에 듣는 여자의 그런 목소리는 빨리 자고 싶게 하지 않느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몇 번인가 궁싯거리다 나는 잠이 들었고 새벽녘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까지 다른 것은 없었다. 출근하는 그의 뒤를 따라 나서는데 엘리베이터가 왔다. 안으로 들어간 그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뭔가를 말했는데 문이 닫히는 바람에 그의 말은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말았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침대 위를 정리하며 그날 따라 유난히 많이 떨어져 있는 그의 머리카락과 하얀 각질을 보았다. 늘 보던 것이었는데도 그날의 그 자리는 파충류가 빠져나간 자리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며칠 후에 나는 시동생으로부터 형님이 여자와 함께 대전 역 플랫폼에 서 있더라는 전화를 받았다.
어제 오후에는 그의 방에 들어가 잠궈 놓은 서랍을 열어보았다. 이런저런 회사의 서류들 밑에 낡은 편지 봉투들이 누렇게 얼룩이 진 채로 쌓여 있었다. 우리의 초라한 삶만큼이나 길고 지루한 시간을 지나온 편지들이 날개 잃은 새처럼 슬프게 느껴졌다.
그것을 들춰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나는 서랍을 다시 잠그고 말았다. 그는 여지껏 연애하던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야. 마치 그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허공을 향해 거칠게 뇌사렸다.
답답하게 조여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엘이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어디선가 숨이 막힐 듯한 농염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무엇을, 누구를 찾아 헤매는 향기인가. 인공향일 거라는 내 의도와 자연향이라는 후각과의 혼란이 반복되었다.
원망스럽게도 그 향은 사람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방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서서 보니 아파트 화단에 심어진 만리향 나무에 붉은 상처 같은 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 향이 만리나 간다는 꽃.
얼마나 지독한 그리움이었으면 그토록 강한 향기를 멀리 뿜어 누군가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미 오래 전에 나도 그를 향해 향기를 내뿜는 수줍은 나무였던 적이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쓸쓸한 웃음이 나온다.
그렇지만 남편은 지금 그 농도 짙은 다른 향기에 뇌사 당해 눈멀고 귀 멀어 있지는 않는지. 이제는 부질없는 일일뿐이다. 나는 이제 남편을 향해 뿜어낼 향기 대신 독기를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오전에는 분주하다. 세 여자들의 등을 닦고 나자 주저앉고 싶어진다. 몸 구석구석에 차지게 들러붙어 있는 고단함을 떼어낼 재간이 없다. 잠깐의 시간을 이용해 등에 수건을 두르고 벽면에 기대앉아 등걸잠을 청해본다.
몸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느낌인데 정신은 수탐하듯 또렷하다. 그래도 눈을 감으면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죽음의 공포도 없다. 어둠과 죽음은 동질성을 내포하고 있다.
신경이 바다 속을 헤매듯 아득히 잦아들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젊은 여자가 아이의 머리를 감기다가 칭얼대니까 뺨을 철썩 때린 모양이다. 아이는 엄마의 손에 매달려 있다가 조막 만한 주먹을 엄마의 얼굴에 날린다.
화가 난 여자는 아이를 세워놓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패댄다. 할머니 한 분이 여자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밖으로 나간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여자는 침을 탁 뱉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감기 시작한다. 남편이 얼마 전에 레미콘 사고를 당하여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여자다.
삶의 곳곳에서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불운들이 인간을 얼마나 혹독하게 괴롭히고 있는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그녀에게 말 할 상대가 있느냐고 묻고 싶다. 누군가를 붙잡고 물크러진 내 심경을 다 내보여 버리면, 그러면 이 아득함이 좀 사라질까.
차가운 손이 어깨를 흔든다. 허벅지에 연꽃의 문신이 새겨진 깜조록한 피부를 가진 여자다. 연꽃은 허벅지뿐만 아니라 팔에도 가슴에도 만발해 있다. 흥, 주제에 연꽃이라니. 진흙도 아닌, 악취 나는 하수구에 잠겨 허우적대면서도 언젠가는 맑고 화사한 생을 피워보고 싶은 모양이지.
그래, 인간은 제가 갖지 못하는 것을 꿈꾸는지도 모르지. 가까이 갈 수 없는 것 옆에는 더 가고 싶은 열망이 생기는 법이지. 남편도 그랬으니까. 승천하는 용이 되라고 내 생을 다 내주었더니 결국은 여자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라니.
비비람에 너덜너덜해진 외양간의 구차한 삶도 잘 견디더니 이제 반듯하게 서서 한숨 쉬어도 될만하니 생각이 달라지던가. 그렇게 살아온 시간들이 억울해졌던가. 그를 바라보고 산 나는 무엇인가. 그 많은 것들을 참고 견뎌낸 나는. 결국 내가 추종하던 용의 실체는 허상이었단 말인가.
연꽃 봉오리가 반쯤 열려있는 배꼽 밑에 이르자 나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주어진다. 얼마나 세게 문질러댔는지 그 부위가 벌겋게 자국이 생긴다. 그런데도 여자는 황홀한 표정이다. 내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살갗이 붉은빛을 토해내건만 여자는 제 손을 가져다 그 부분을 애무하듯 어루만진다.
그럴수록 증오심을 실은 내 손은 연꽃 무늬 위에서 격하게 춤을 춘다. 이제 수난을 당하는 건 여자의 배가 아니라 그 위에 피어난 연꽃이었다. 내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여자의 가슴에 핀 연꽃 위에 떨어진다.
상처가 쓰리는지 여자는 한순간 양미간을 찌뿌렸지만 금세 무아의 표정으로 돌아간다. 아아, 어쩌면 연꽃이기를 꿈꾼 건 저 여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남편이 개천의 용이길 소원했다면 나는 그를 승천시키고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이고자 한 건 아닐까.
나는 개천에서 태어난 그와 결혼하여 그 가정을 성공적으로 일으키려는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남편이 그 환상을 깨뜨리는 순간 내 연꽃은 사라지고 그래서 나는 분노하고 있는 것인가. 연꽃이 되지 못하면 나는 옥잠화로라도 피어나 다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때수건을 헹구고 있는 동안 스물 대여섯쯤의 여자는 비닐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몽롱한 표정으로 껌을 씹고 있다. 그 나이에도 저렇게 눅진눅진한 여자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나는 신기하기까지 하다. 떡딱 소리가 날 때마다 여자는 몸을 바르르 떤다.
배시시 웃기도 한다. 천장을 향해 화장이 지워져 얼룩진 눈을 땡그랗게 뜨고 누워있는 여자가 문득 무서워진다. 씹는다는 거, 짜게 절은 생의 무늬를 씹는 맛을 그녀는 알까. 그녀에게 씹히는 것들의 존재는 무엇일까. 슬픔, 증오, 분노, 남자, 세상, 아니면 그 어떤 환희…. 그녀의 젖가슴께에 내 손이 닿자 여자가 몸을 꼬며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여자가 주문한대로 계란을 깨서 맛사지 준비를 한다. 노른자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거품기를 휘휘 돌려 흰자의 입자를 붙임성 좋게 만든다. 코처럼 느른한 그것은 둥근 결을 이루며 완벽하게 부드러운 찰기를 만들어낸다.
희뿌연한 수증기 속에서 보면 정액으로 착각하게 하는, 비린내 나는 계란 흰자를 그녀의 얼굴에 바르고 목에, 가슴에 바르는데 오장육부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여자는 봄볕처럼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입에서 뜨거운 침이 고이고 회가 동하는 것과 동시에 피가 거꾸로 솟는다. 내 몸을 돌고 있는 피돌기의 모든 세포들이 팽창하여 위험수위를 향해 치닫는 어느 순간 나는 폭발 직전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살아야 해. 수도꼭지를 세게 틀자 팽팽한 압력 속에 갇혀있던 물이 콸콸 쏟아진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 다시 여자에게 다가간 나는 민감해진 후각에서 기어이 남편의 정액 냄새를 맡고 만다.
뜨거운 것들이 울컥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찬물을 한 바가지 퍼든 두 손이 파득거린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갈등 없이 그 물을 그녀에게 휙 뿌리고 말았다.
쉼 없이 움직이던 입술이 정지되고 몽롱하던 눈동자가 홰등잔만해지더니 그녀는 시체처럼 조용히 일어나 내게로 왔다.
“야 이년아!”
우주의 기를 모아들이듯 숨을 천천히 들이마신 그 여자는 아주 길게 야 이년아를 내지르더니 내 머리채를 잡아 저만치 내동댕이친다.
“술집년 팔자나 때밀이 팔자나 다를 게 뭐 있다고 지랄이야, 지랄은. 씨팔, 네년도 거시기에 금띠 두른 팔자는 아니잖아, 이년아?”
세상의 모든 진실이 증발해 버렸다는 걸 느낄 때 이런 무기력증에 함몰되는 걸까.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나동그라진 채로 주저앉아 씹던 껌을 내게 퉤하고 내뱉는 여자를 노려보고만 있다.
"에이, 재수없어."
침을 한 번 툇하고 더 뱉더니 여자는 밖으로 나간다. 순간 나른한 그 무엇이 전신을 관통했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나는 그녀의 악담을 수긍한다. 그래, 네 꼬락서니나 내 꼬락서니가 다를 게 뭐 있겠니. 누구나 화려한 무대 위에 서 있고 싶지, 누가 자신을 팔며 인생의 뒤안길에 남아 있고 싶겠니. 그녀 역시 악취 나는 음습한 연못보다는 맑고 화사한 연못에서 피어나고 싶었겠지.
여자가 빠져나간 출입문을 바라본다. 환시였을까. 어룽진 유리창엔 연꽃이 무리 지어 해끔하게 피어 있다. 그녀가 피워 놓은 꽃들이다. 불현듯 단 한 송이라도 내 꽃을 피워보고 싶다는 열망이 화산처럼 폭발한다.
나는 소스라쳐 일어나 물 한 바가지를 몸에 끼얹고는 탕 밖으로 나온다. 주인 여자가 그 여자를 달래고 있다. 나는 물이 줄줄 흐르는 채로 옷을 주워 입는다.
“아줌마, 손님에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사과하지 못해요?”
형광등 불빛 아래 종알대는 주인 여자의 얼굴이 꼭 두억신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곳을 나왔다.
햇덩이가 유리창 너머로 기울고 있다. 빛의 농도가 옅어지자 나는 용기를 내어 블라인드를 확 걷어챘다. 악력을 담은 그 힘에 의해 블라인드의 한 쪽 끝이 망가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투두둑 다 내려앉아 버렸다.
순간 환한 빛이 두 눈을 찌른다.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어디로 피해야 할까. 빛을 피해 도망가야 한다는 자아와 도망치면 비겁하다는 또 다른 자아가 싸우고 있다. 이 너른 세상에 나를 숨겨줄 안전지대는 그 어디에도 없을뿐더러 더 이상 내게 그늘을 드리워줄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궁지에 몰려 있다는 자각이 온다. 불현듯 오기가 치받힌다. 볼 테면 봐라, 내게 감춰야 할 무엇이 또 남아 있는가. 누군가 나를 기웃거리는 것 같아 전전긍긍하던 내 몸을 당당하게 드러내줘야지.
그늘에만 숨어 지내던 내 육신에게도 해의 빛을 만끽하게 해주고, 최소한의 표면적을 갖고 살던 영혼에게는 너른 세상의 자유를 주고 싶다. 늘 가족들에게 매여 내 삶이 아닌 그들의 삶에 끌려다니느라 날갯짓 한 번 해보지 못한 내 심신에게 나비와 같은 사뿐한 자유를 줘야지. 이 무거운 몸뚱이에서 빠져 나와 훨훨 한 번 날아 보리라.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고 베란다에 나와 선다. 저만치 앞 동 주차장에 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하루를 보내고 가족들의 식탁을 마련하기 위해 주부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순백색의 중형차 옆에 검정색 투피스 차림의 여자가 서 있다.
여자는 핸드백을 열어 뭔가를 찾더니 차에 오른다. 남루하고 지쳐 보이는 다른 차들에 비해 여자의 차는 제왕처럼 늠름하고 품위 있게 아파트 정문을 향해 스르르 미끄러진다. 여자는 다른 여자들이 돌아오는 이 시간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 시간에 돌아오는 자와 나가는 자의 삶의 진실에 대해 누가 무어라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내가 목욕탕에서 만난 여자가 저 여자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해야 한다. 여자가 빠져나간 거리를 좇아가던 내 시선이 서산에 걸려있는 태양에게로 옮겨간다.
장엄한 황혼이 아직은 서쪽 하늘에 온전하게 남아 있어 눈이 부시다. 저물었어도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그 화려함으로 인한 환상일까. 몸 어딘가에서 스멀스멀한 기운이 솟아나더니 황혼 빛의 용 한 마리가 내 앞에 서 있다.
그는 여자를 구해내는 용사처럼 베란다 창살을 꺾더니 나를 한 번 돌아본다. 그의 묘한 눈빛에 빨려들어 나는 문득 그와 교접하고 싶은 욕망이 격렬하게 솟는다. 순간 나는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묘한 엑스타시에 빠져든다. 온갖 고통이나 슬픔 따위는 다 비워지고 몸이 부웅 떠오르듯 가뿐해진다.
어느새 내 안에서는 두 개의 내가 싸우고 있다. 나는 나를 자꾸 밀어내고 있다. 밖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 사력을 다한다. 목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마침내 싸움에서 진 내가 파열음을 내며 몸을 뚫고 나와 허공으로 떨어진다.
나는 뇌리에서 종기를 떼어내는 것처럼 떨어져 나간 나를 본다. 죽어버린 그 종기의 거대한 모습이 승천하려다 떨어지는 이무기로 보인다. 피안의 세계를 꿈꾸며 오랫동안 내 안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던 용은 허상일 뿐이었다.
아아, 그랬었구나. 내 목을 조이고 내 삶 전체를 조였던 것은 남편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서 그려낸 허깨 비 용이었다. 그가 승천하면, 그를 따라 나 역시도 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남편은 그저 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을. 화려한 노을빛 용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건 늙은 이파리 몇 개를 매단 은행나무일 뿐이다.
베란다 창살을 움켜쥔 손에 땀이 흥건하다. 살아있던 의식이 피돌기와 함께 온몸으로 퍼져간다. 환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과정이 그토록 지난한 길이었는가. 애당초 용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나는 왜 믿으려 하지 않았던가. 어두운 미로를 헤매다 간신히 출구 앞에 선 나는 지금, 빛살의 세례를 맞받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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