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 철학과 출신들은 ‘입심’이 센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타협적이지 못하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평도 철학과 출신들에게 흔히 뒤따르는 평이다. 상대방에게 지지 않으려는 성격 때문에 철학과 출신이 낀 대화의 자리는 곧잘 ‘화끈한’ 논쟁이 벌어진다.
학문적 성격과 함께 이대학 철학과만의 독특한 대학문화가 이같은 특징을 갖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동문들이 많다. 이대학 철학과 출신 대부분이 ‘술’과 ‘토론’을 대학시절 가장 중요한 추억으로 간직한다. 술에 얽힌 대학시절 ‘전설같은’ 일화들도 유달리 많이 전해진다.
서양의 ‘소요학파’를 빗대 야외 잔디밭 수업을 많이 했으며, 잔디밭 수업때는 으례 막걸리 통을 옆에 두었다. 1인당 막걸리 한통씩 짊어지고 가련산으로 올라가 통행금지를 무시한 채 밤샘 토론을 벌이는 것도 허다했단다.
최규원씨(익산남성중교사)의 회고담. “정년퇴직한 신광철교수는 원서강독 시간에 막걸리를 상금으로 건 적도 있었습니다. 술자리에서는 상의를 뒤집어 입고(막걸리 얼룩 방지 효과 등을 내세우며) 구수한 입담으로 혼을 뺐습니다.”
선배들의 명에 의해 수업 대신 막걸리를 먹고 축구 경기를 하거나 캠퍼스 연못 주변 잔디밭에서 모두 옷을 벗고 막걸기를 마신 일 등을 대학시절 낭만으로 떠올리는 동문들이 많다.
계열별 모집이 이루어지기 전인 76학번까지 모집 정원이 10명으로 학생 수는 적었지만 철학과에 톡톡 튀는 ‘명물’들이 많았다. 아무개 하면 여름에 두터운 오버코트를 입고 다닌 사람으로 회자되고, 지금은 유명인사가 된 누구는 이수일 망토에 백구두를 신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남부시장에서 5백원을 주고 산 다 떨어진 미군 워커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도 60∼70년대 철학과생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단다.
군사 독재시절에 정보기관의 요주의 사찰 대상이 철학과였다. 70년대 중반 전북대에서 일어난 유신 철폐 시위는 73학번인 이임갑씨와 74학번인 이광철씨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임갑씨는 결국 제적돼 고려대 철학과 재입학해 미국·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후 강단에 서다 2년전 암으로 작고했다.
빡빡머리에 혼자 분수대 앞에서 민주화를 외치며 6차례의 수배와 4차례의 구속에 간첩죄로까지 몰렸던(후에 무죄 판결) 이광철씨는 현재 시민운동21 공동대표로 활동중이다.
8백여명에 이르는 철학과 졸업생들의 현주소도 학창시절 개성만큼이나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전체적으로 교직에 많이 진출해 있다. 문용주 현 도교육감이 70학번이다. 72학번으로 초대 전교조 전북위원장을 맡은 김윤수씨도 이대학 철학과 출신이다.
정중환씨(59년 졸업)는 부안삼남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별을 단 동문으로 조재토 육군준장(71년도 졸업)이 있으며, 행정고시에 합격해 현 전주부시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전희재씨(78년도 졸업)가 있다. 김상두 장수군수도 이대학 철학과 출신이다.
학계에서 전북대 철학과 출신들이 많은 족적을 남겼다. 고인이 된 이강오교수(55년졸업)를 비롯, 김영철(현 동창회장)·곽강제(66년 졸업)·최영찬(72년 졸업) 교수 등이 모교 강단에 섰거나 재직중이다. 오병무(순천대)·송경호(서원대)·김선호(우석대)·황갑연교수(순천대) 등이 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한때 사회를 떠들석하게 했던 시한부 종말론을 강도높게 비판하다 살해된 탁명환씨도 전북대 철학과 출신이다. 현재 아들이 유지를 받들어 지키고 있는 국제종교문제연구소를 만들었던 탁씨는 신흥종교 관련 25권의 저서를 낸 이분야 권위자였다.
언론계에도 많은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KBS청주총국장을 지낸 이정웅씨와 인기드라마 ‘젊은이의 양지’ 연출자인 전산 PD(77학번)가 철학과 출신이다.
이경재(전북일보 정치부장)·안봉호(〃사회부장)·박장우씨(전북제일신문 논설위원) 등은 지금은 사업가로 변신한 강호일씨와 함께 전북일보에 나란히 입사해 철학과 파워를 과시하기도 했다.
전주시의원으로 활동중인 강희봉씨는 ‘막걸리’를 매개로 철학과 선후배 사이의 돈독한 정을 이어주는 동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문용주·오병무(순천대교수)·정현태(잡지윤리간행위원)·여인술(전북대 사서과장)·조성기(농산물유통공사 호남본부장 역임)·박정옥씨(여산고 교사·전북산악회 고문) 등 70학번은 막걸리 문화속에서도 공부를 많이 한 기수로 평가받는다.
/ 나의 대학시절 / 문용주 도교육감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개인사정에 의하여 동기들보다 2년 후에 전북대학교 철학과를 입학하였다. 나는 당시 극도로 외로웠으며, 보통의 삶으로부터 ‘탈출’하고픈 강한 충동에 휩싸여 지내곤 하였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대학생활을 보내며, 주위에 선배, 동료들과 어울리는 활달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의 ‘영혼’은 언제나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시절에 나는 서점에 들려서 신간서적을 구입, 남독(濫讀)하는 일이 나의 일상에 있어서 유일한 즐거움이자 위안거리였다.
그러던 중 지금은 타계하신 이강오 은사님의 인도철학과 불교철학 강의는 나에게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는 철학에 대한 나의 갈망과 ‘진지한 흥미’를 자극하였고, 특히 유신론적 실존주의자(有神論的 實存主義)인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3단계는 나의 실존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 기독교 신앙은 나에게 사람으로서 가장 큰 희망을 갖게 하였으며, 타인을 미워함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게 하여 주었다. ‘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그 심령에 영생이 없다’는 내용의 성경 구절을 읽고 통곡한 적도 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철학과(哲學科) 선·후배, 동기, 배태호 형, 조제토 장군, 쌍용 형, 복희 형, 동양철학의 귀재 오병무, 채동수, 김선호 등을 비롯하여 그들과 나눈 많은 추억은 나에게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더하게 하며, 이 시간에도 보고픔으로 못 견디게 한다.
나는 전북대학교 철학과가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분수령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선(善)함에 접근하고자 하는 인성(人性)을 수련하였고, 어떤 사안에 대한 논리적 분석력은 철학이 그 바탕을 이루었으며, ‘인생(人生)의 한계’와 미래에 대한 ‘커다란 희망’ 또한 철학에서 기인하였다고 본다.
나는 향후 나의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에 대한 결심도 철학에서 느낀 바 결단이다. 지금, 앞으로 결행할 결단에 대하여 내 스스로 자족함도 철학에서 얻어진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전주 인후동 삼천서원
전주시 인후동 기린삼거리 부근 한 5층 건물에 ‘심천서원’이라는 작은 간판이 걸려있다. 전북대 철학과 동창회 일을 오랫동안 맡았던 순천대 오병무교수가 운영하는 이곳에는 전·현직 교수들부터 연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강오 교수의 호를 따 ‘심천’으로 이름 붙인 이 서실은 40평 남짓에 3만여권의 장서를 갖춰 왠만한 도서관을 능가한다. 이교수의 손때 묻은 책들이 1만여권이나 될 만큼 그의 체취가 남겨진 이곳을 찾는 단골도 이교수를 따랐던 제자들이 주축을 이룬다.
이재훈(전주교대 교수)·김선호(우석대 교수)·황갑연(순천대 교수)·이경무(서원대 교수)를 비롯, 김영기·이문성·한성기·박준호씨 등이 서원 주요 멤버들이다. 여기에 정년퇴직한 송현규교수와 김영철교수도 가끔씩 들러 후배·제자들과 어울린다.
생전에 신흥종교와 민속학에 남다른 열정과 많은 업적을 남긴 심천은 1만여 자료를 애제자인 오교수에게 물려주었다. 13개 계통의 신흥종교와 4백여 종단의 자료를 비롯, 2만장에 이르는 신흥종교 관련 흑백사진은 국내 어디서도 구하기 힘든 희귀자료로 평가받는다.
심천이 생전에 발굴한 익산기세배놀이·삼기농요·띠벳놀이 등 민속 관련 소중한 자료들도 소장돼 있다.나머지 2만여권의 책은 오교수 개인 소유지만 이곳을 찾는 연구자들에게 공공 도서관처럼 제공되고 있다.
“이강오교수는 책을 보는 데 집중력이 뛰어났습니다. 앞에 강의가 끝나지 않아 복도에 기다리면서 책을 보면 강의 시간이 한 참 지난 뒤임에도 잘 몰랐습니다. ”책을 보면서 입에 담배를 물고 다시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부칠 정도로 책에 집중하신 분이었다고 제자들은 이교수를 회고했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