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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현교수의 판소리 길라잡이] 창극은 언제 어떻게

 



판소리와 관련된 것들 중에서 창극은 오명창시대에 와서야 생겨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창극은 연극적인 판소리이다. 판소리는 본래 한 사람의 창자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노래로 부르는 양식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판소리가 극으로 만들어졌는가.

 

창극이 생겨난 것은 서양식 극장의 도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극장은 협률사(協律社)(후에 원각사로 불렀음)인데, 이 극장은 고종의 즉위 40주년 행사를 치르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그 행사장으로 건립되었다.

 

여기서는 전국의 명창들을 모아 정식 월급을 주면서 행사를 준비했다. 이 때 총 책임을 맡은 사람이 바로 김창환이었다. 이 때 전국에서 올라온 명창들은 17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한꺼번에 공연을 하려다 보니, 새로운 양식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참여했던 강용환 등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창희 등을 모방해서 창극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가 1902년이다. 그래서 올해를 창극 탄생 백년이 되는 해라고 해서, 국립창극단에서는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창극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창극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그저 몇 사람이 등장해서 배역에 따라 자기가 맡은 배역의 소리를 하는 정도였을 것으로 본다.

 

물론 무대장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창극은 이보다 훨씬 후에 생겨났다. 무대장치까지 하고, 연기를 곁들이면서 하는 창극은 1935년 경에야 만들어졌는데, 이 때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정정렬이었다.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행사 자체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1902년에는 콜레라가 유행해서 다음해 봄으로 미루었다가, 1903년 봄에는 또 영친왕이 천연두에 걸려 다시 가을로 미루었으나, 가을에는 러일전쟁 분위기로 인해 예식은 형식만 갖추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그 대신 협률사는 이후 여러 가지 흥행물을 공연하는 공연장이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1902년 행사를 위해 준비했다는 창극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이 실제로 공연되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그렇지만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02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러니까 1902년을 창극의 원년으로 삼는 것은 1902년보다 앞설 수 없다는 의미이지, 꼭 그 때 창극이 만들어져서 공연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 것이다.

 

/ 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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