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치계가 참으로 분주한 발걸음을 하고 있다.
대선 후보 경선에 지방은 지방대로 단체장 및 의원 지망생들이 출사표를 던지는 등 벌써부터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생각나는 사람이 느헤미야다.
그는 페르시아의 전성기였던 아닥사스다 왕 시대 인물로 왕의 술상을 책임지는 관원이었다.
왕의 절대적 신뢰를 받았으며 상당히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관심은 자신의 행복과 안정에 있지 않았다.
외국에 거주하지만 조상이 살던 고국과 예루살렘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주전 515년경 다시 지어진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
그런데 성전을 보호할 성벽이나 성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외부 공격에 쉽사리 노출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기까지 했다.
어느 날 느헤미야는 어설프게나마 지탱해주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마저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수일 동안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웃고 우는지를 알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의 실수와 불행을 보고 웃거나 사사로운 것에 실망하고 우는자들은 인격이 덜 성숙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 특히 하나님의 도성이 무너지고 불태워졌다는 소식에 며칠을 금식하며 울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느헤미야가 비극적인 소식에 마냥 울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어떤 일을 시도하기 전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그는 자기 민족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예루살렘이 당한 수모의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탄 것에 대해 느헤미야에게 일차적 책임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페르시아 궁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사건 발생 원인에 자신을 포함시켰다.
바로 이것이 몸과 지체의 관계다.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픈 것이다. 한 지체가 죄를 지으면 온 몸이 죄를 짓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의 고통을 자신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남을 탓하기 전 먼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했다.
여기서 머물지 않고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일에 뛰어들 것을 결단했다.
그는 어느 누구를 보내달라고, 그래서 예루살렘 성읍이 다시 온전해지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라고 기도했다.
자신이 머물던 궁전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편안과 안전을 버리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예루살렘의 부흥을 반대하는 자들의 고통과 비웃음 중상모략을 견뎌야만 했다.
결국 느헤미야의 헌신적 결단으로 성벽은 52일 만에 재건되고 성문도 복원됐다.
최근 줄줄이 드러나는 정치적 비리와 부패가 가슴 아프게 한다. 화도 난다.
그러나 그런 정치지도자들을 누가 뽑았는가?
이제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결단해야 한다. 이 나라를 위해 울며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지금도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 이순태 (전주신광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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