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마셔야 제맛을 알 수 있지만 술을 빚어내는 정성과 술을 대하는 예절이 더해진다면 멋과 운치를 더할 수 있다.
오감(五感)으로 술을 체험할 수 있는 전주전통술박물관(관장 다음·37)이 9일 개관한다.
전통문화사랑모임(대표 이동엽)이 수탁한 전통술박물관은 전통술 제조과정을 재현하고 직접 참여해보는 체험공간과 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전시의 성격을 두루 갖추고 있다.
전통 술 중에서도 전주에서 만들어진 과하주(過夏酒)를 중심으로 빚어내고, 주법을 익히고, 음미하고, 다른 술과 비교해보는 술을 둘러싼 문화를 피워내는 공간이랄 수 있다. 다음관장의 표현대로 ‘전통과 토종을 오늘에 되살리는 온고지신으로 폭음과 방종으로 흐르고 있는 그릇된 요즘의 술문화를 하나씩 바꿔나가는 전초기지’인 셈이다.
전주코아리베라호텔 뒤편에 단아한 한옥 한채에 내려앉은 술박물관은 술을 제조하고 발효시키고 숙성시키는 수을관( 乙館)과 향음주례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계영실(誡盈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하늘에 술을 바치고 예를 다했던 포석정에서 따온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재현, 술과 자연의 합일을 이룬 앞마당이 있다.
술이 풍기는 향기와 소리를 전할 수을관은 술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공간. 김천일 장군이 즐겼다해서 ‘장군주’로 이름 붙여진 과하주 담그는 과정을 기능보유자인 김남옥 할머니(82)가 그대로 재현한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녹두 누룩과 찹쌀, 정한수와도 같은 깨끗한 물을 재료로 쓰는 과하주의 특징을 한눈에 만날 수 있다.
전시실에는 각종 술 도구와 주조 재료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누룩 발효실과 숙성실에서는 술이 익는 소리(?)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발효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특수 스피커 시설까지 갖추었다.
전통 음주예법의 재현과 교육은 전통술박물관의 중심 프로그램이다.
‘잔이 넘치는 것을 경계한다’는 뜻을 지닌 계영실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행했던 향음주례에 따라 건전한 음주문화를 접하고 체득할 수 있게 한다.
과하주 맛을 보고, 술과 관련된 기획상품도 구입할 수 있으며 술문화와 관련된 기획 전시도 열 계획이다.
9일 개관에 맞춰 열리는 기념행사는 전통적인 술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다. 오후 2시 한옥체험관에서 갖는 ‘향음주례’는 헌빈례(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대접하는 예)와 악빈례(손님에게 음악을 들려드리는 예), 그리고 여수례(상차림을 준비했던 사람들에게 노고를 위로하는 예를 갖추고 손님을 배웅하는 예)를 차례로 밟으며 전통 술문화를 재현하는 자리. 좀체 만나기 어려운 자리다.
오후 4시에는 술박물관에서 술재료와 소줏고리 등 도구를 활용해 과하주를 빚어내는 김남옥할머니의 기법이 재현된다. 개관식에서는 월드컵 성공개최 기원을 담은 과하주 2002병을 방문객들에게 선물로 나눠준다.
4일 오후 전주한옥생활체험관 대청(다경루)에서 만난 다음 관장(茶飮·본명 김창덕)은 옛날 선비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한달 보름째 향음주례를 옮겨 적고 있습니다. 전통술박물관 개관에 맞추려고 했지만 힘드네요.”
한솔종이박물관에서 사온 한지에 줄을 긋고, 보물 1181호로 지정된 향음주례를 써내려가고 있는 그는 개관행사는 물론 개관식에 참여하는 사람의 인적사항까지 일일이 기록할 예정이다. 술박물관의 역사를 남기는 첫 작업인 셈이다.
“술은 귀하게 마셔야 합니다. 시민들이, 특히 어린 학생들이 좋은 술을 만들고 시음하는 과정에서 술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잔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술을 대하는 예법의 시작이라는 그는 전통술박물관이 단순한 전시관이 아니라고 말한다. 술빚는 과정은 물론 향음주례 교육, 전통술 강좌 등 체험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차려놓은데다 술에 관한 기획전시도 준비중에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
“당초 시의 계획은 우리 술과 세계의 술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단순한 형태였어요. 이게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전통술을 컨셉으로 설정하고 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예법을 뼈대로 세운겁니다.”
전통술의 역사와 풍속 뿐아니라 술에 관한 탁본과 민화 등 술을 주제로한 그림전, 술이 있는 음악회 등을 기획하고 있다.
“술을 좋아해서 술독에 빠져 살라고 관장을 시킨 것 같다”는 그는 이지역 문화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그러나 98년부터 전통문화사랑모임에서 활동하며 토종찾기, 산조페스티벌 등에 참여해온 그의 이력을 보면 남다른 그의 활동에 관심을 갖게 한다.
남원이 고향인 그는 한때 불교에 귀의했던 스님이자, 동국대 불교대학원 미술사를 전공한 화가다. 89년과 90년 시카고 주립대와 LA에서, 95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달마도와 동자승, 승무 등을 화폭에 담은 작품을 전시했고 97년에는 광주비엔날레 기간동안 탑전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오종근씨(전통문화사랑모임 사무국장)와 박시도씨(다문 대표) 등 전통문화사랑모임 식구와의 인연으로 전주에 자리잡은 그는 “술도 나눠야 하듯 문화도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통문화사랑모임에 참여해왔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실제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큰 것보다는 조그만한 것에서 아름다움과 여유를 찾는 문화가 중요하다”는 그의 바람은 전통술박물관이 지역민과 관광객들, 특히 나이 어린 청소년들에게 유익한 공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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