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대 약학과 역사는 곧 우석대 역사다. 대학 설립인가와 동시에 설치된, 단지 오래된 학과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다. 대학 설립자인 지금은 고인이 된 서정상이사장 스스로가 약학박사에 약학 전공 교수였고, 대학측 역시 약학과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개교때부터 각별했다.
초창기의 대학이 대부분 그렇듯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우석대가 일반에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약학과 때문이었다. 대학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83년 첫 졸업생 전원이 약사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4년 연속 약사국가고시 1백%라는, 오랜 전통의 명문대학에서도 세우기 힘든 기록을 만들며 우석대 약학과는 이대학 간판 학과로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됐다.
산뜻하게 출발 만큼이나 이대학 약학과 출신들의 사회에서 활약은 톡톡 튄다. 같은 약국을 하더라도 과거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 퍼져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동문들이 많은 것도 특유의 도전 정신이 강하기 때문으로 대학관계자와 동문들은 해석한다.
“대학 초기 모든 면에서 열악했습니다. 현재 고교로 사용되는 캠퍼스는 물론, 실험실 등 모든 게 빈약했지만 교수님이나 학생 모두 참으로 열심히 가르치고 공부했습니다.” 현재 전주 E마트 앞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1회 홍정옥씨의 회고다.
어려웠던 대학 시절 만큼 동문들간 유대도 돈독하다. 중·고 친구들보다 더 친하다 할 만큼 동기들간 못할 이야기가 없다는 동문들도 많다. 자연스럽게 동문들끼리 뭉쳐 약국을 함께 경영하는 사례도 적지않다.
대표적인 곳이 남원 종로약국. 고인석(3회)·권재남(4회)·이재혁씨(5회) 등 동문들이 서로 일정 지분을 갖고 남원지역 대표적 약국으로 발전시켰다. 박경진씨 등 87∼88학번 동기들은 카자흐스탄 등 제3세계로 진출해 약국 뿌리를 내린 경우도 있다. 개업 여건이 안되는 후배들을 관리 약사로 채용해 끌어주는 것도 전통이다.
약국 경영 관련 실험적이고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중심에도 우석대 동문들이 적지않다. 약학과 맏형으로 통하는 문규성씨(3회, 익산종로약국)는 전국적으로 대형 약국을 처음 시도한 장본인. 문씨는 후배 이재혁씨 등 몇몇 동문들과 함께 지난 99년 서울·부산 등 각지의 약국들이 주주로 참여해 만든 약국 최대 체인망인 리프팜 개설을 주도했다. 의약시장 개방에 대비해 대형약국 혹은 체인망으로 대응하자는 취지에서였다.
전문인을 양성하는 학과 특성상 7백여명의 졸업 동문 대다수는 약사 혹은 관련 전문직에 종사한다. 전국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수도권 지역에만도 1백여명에 이르며, 많은 동문들이 지역 약사회 임원들의 활동하고 있다는 게 경인지역 약대 동문회장을 역임한 전재균씨(4회, 고양시약사회 약학위원장)의 이야기.
현 경인지역 회장으로 있는 김종우씨(8회, 제일약국)가 의정부청년회의소 회장와 의정부약사회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강인호(3회, 수원약사회 총무위원장)·김주원씨(4회·고양시약사회 총무위원장) 총무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주시약사회 부회장으로 있는 길강섭씨(3회)도 동문이다.
전문직으로 진출한 동문도 있다. 전북대병원 약제과장으로 있는 원경숙씨(2회)를 비롯, 이동희(6회, 대구식약청)·김용훈(8회·식약청)·이남희씨(9회·식약청) 등이 그들.
전훈(4회)·김대근교수(5회)는 모교에서 후배를 가르치고 있고, 임재윤(6회, 시카고대 post-doc)·김영일씨(7회, 건양대교수) 등은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전공보다 다른 분야에서 능력을 나타내는 동문들도 있다. 이인하씨(9회)는 약대 졸업후 첼로를 전공, 첼리스트로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특이한 사례다. 전주시의원으로 있는 이재천씨와 충남도의원으로 활동하는 송영철씨(17회, 유일약품대표)는 정치쪽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 나의 대학시절/ 전 훈(우석대 약학대교수·4회)
나는 82학번으로 입학할 당시 우리 약학과는 우석대의 초창기 설립학과이며 대표적인 학과로 설립자이신 故 서 정상 이사장님의 특별한 애정이 기억된다.
그 당시 사회에 진출한 선배도 없었으며, 4학년 선배가 1회였던 터라 학과 선후배간의 애정과 결속력은 대단하였다. 학교 행사시의 출석률은 매우 높았고, 교수님들의 열의 또한 대단하였다. 밤늦은 시간까지 실험실에서 실습을 하며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애를 먹기도 했다.
교수님들의 학점 또한 매우 깐깐하여 재수강 하느라 정신없었던 학창시절, 하지만 우리는 과에 대한 자부심만은 대단했었다. 대학 4학년 때 국가고시 준비를 위한 1년간(격주에 한번씩)의 모의고사는 우리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지만, 결과적으로 1회부터 4회까지 4년간 약사국가고시 100% 합격이라는 前代未聞의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여기는 대목이다. 그 당시 교수님들의 열의와 성의는 현재 나의 자리에서 보았을 때 새삼 느끼는 바가 크며, 현재 나도 그 당시 교수님들의 활동을 표본모델로 생각하며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또한 반복되는 시험의 연속 속에서도 우리는 대학생활의 낭만은 버리지 않았으며, 이런 때일수록 체육대회, 축제 그리고 MT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교수님과 선후배간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었다. 체육대회가 끝난 뒤 운동장에서 막걸리로 지친 몸과 타는 갈증을 달래가며 앞날의 설계를 논의하였던 시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느끼곤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그 당시 선후배간의 우정은 2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20여년 전의 내 모습을 돌이켜 지금을 생각한 것과 같이 또한 20여년이 지난 미래의 어느 날엔가 다시 오늘을 그 때의 추억처럼 되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심 기대된다.
▣ 음악동아리 "비바체"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에 대한 추억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기 마련. 특히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까지 함께 했다면 그들 사이는 더욱 친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대학시절 ‘비바체’라는 음악 동아리 활동을 함께 한 우석대 약학과 동문들이 그렇다.
지난 81년 결성된 이 동아리는 약대 재학생들의 대표적 동아리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수당 평균 4∼5명이 참여해 현 막내둥이 23기까지 이 동아리를 거쳐간 회원만도 1백명에 육박한다. 재학시절 비바체 동아리 활동을 했던 많은 동문들은 졸업후에도 동아리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실제 재학생들의 뮤직캠프때는 물론, 정기연주회때 동아리 출신 선배들은 항상 든든한 후원자다. 한 해 4차례씩 갖는 야외 뮤직캠프에 재학생들은 선배들을 초청하고, 이에 기꺼히 참가하는 선배들은 후배 재학생에 대한 격려와 지난 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운단다.
매년 한 차례씩 갖는 정기연주회도 재학생 동아리 회원들과 졸업 동문들의 자랑. 학내 연주에서 벗어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일반 무대에서 이 동아리가 정기연주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선배들의 뒷받침이 있기에 가능했다. 경제적 후원은 물론, 많은 졸업동문들이 정기연주회 참여해 후배 재학생들과 무대에서 화음을 이루어낸다. 특히 지난해 전북예술회관에서 가진 21회째 정기연주회때는 선후배는 물론, 가족들까지 무대에 함께 서 감동을 더해주었다.
비바체를 매개로 선후배 동문간 유대를 돈독히 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문규성씨(3회)는 “자녀·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서보고 싶었던 꿈이 지난해 이루어졌다”며, “도내 뿐아니라 서울·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동문들이 가족들과 함께 참여해 그야말로 축제가 되고 있다”고 자랑했다.
현재 동아리 지도를 맡고 있는 양재헌교수는 “동아리에 들어와 대부분 처음 악기를 접하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할 수가 없다”며, 이같은 열정이 사회활동에까지 연결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사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동문중에 이동아리 출신이 많으며, 이인하씨(87학번)는 아예 첼리스트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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