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을 몇 년 앞두고 원광대학교의 개교 반백년사 편집을 담당한 적이 있다. ‘원광의 얼과 흐름’과 ‘사진으로 본 원광 반백년’이라는 두권의 책을 출판하면서, 대학발전사 자료를 알뜰하게 살필 수 있었다.
해방당시의 개교를 준비하던 상황에서부터, 색바랜 흑백사진에 박정희대통령의 모습이 나타나고, 냉전체제가 무너지는 시기에는 고르바초프의 모습도 등장하고 있다.
대학이 근대한국사조의 흐름과 함께 해왔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시대를 구분하여 1940년대는 ‘정신개벽의 요람’, 1950년대는 ‘폐허위에 선 상아탑’, 1960년대는 ‘국가재건의 함성’, 1970년대는 ‘종합대학으로 웅비’, 1980년대는 ‘산업화 민주화의 역군’, 1990년대는 ‘세계를 향한 도약’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과연 명문사학으로 국내·외에 명성을 떨치는 오늘의 위용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재학시절인 1960년대의 캠퍼스는 아담한 가운데 낭만이 가득하였다. 시민들의 표정은 ‘목천포도 포구냐, 호박꽃도 꽃이냐, 멸치도 생선이냐, 원광대학도 대학이냐?!’는 말로 요약되지만, 학내에 들어서면 이르는 곳에서 머리가 절로 숙여지는 어른들과 만난다.
대학에서는 다양한 특강을 마련하여 석학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는데,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학우들의 세계와 미래를 향한 엄청난 열기는, 후일 외국 유학에서는 맛볼 수 없는 향수가 되었다. 간혹 원불교 중앙총부에 모셔진 손님들을 접대하면서 듣는 대화속의 감동은 행복이라고나 할까.
선배들 틈에 끼어 박길진 초대총장의 강의를 몰래 듣곤 하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있는데 말씀이 이어진다. ‘안약장수가 눈이 쬐작쬐작하면 누구 안약을 사간디? 천당에 간 친구가 불평하기를 사람이 없어서 청소당번 하랴, 청소하랴.
고되어서 못살겠다고 했대야. 말로만 하면 안되지. 실천이 중요한 것이여.’ ‘와!’하는 웃음속에 숨이 멎을 듯 진한 감동이 번지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아름다움과 역동성을 어떻게 살려 낼 수 있을까?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