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1903-1982) 시인이 일제말기에 살았던 은거지(전남 광양시 광양읍 칠성리 334번지)가 지방 문예지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최근 발간된 계간 「경남문학」 여름호는 "노산이 1938년 조선일보를 사직한 뒤해방때까지 전라남도 백운산과 광양을 중심으로 은둔 생활을 했다"면서 "노산은 그동안 광양시 진상면 신황마을과 지랑마을 등 백운산 자락의 마을에서 은거생활을 한것으로 알려졌으나 광양읍 칠성리에서도 상당기간 은거한 것이 추가로 밝혀졌다"고공개했다.
시조시인 김교한씨가 이 잡지에 기고한 특집기사 '노산 선생의 은거지 백운산은말한다'는 광양 현지 답사를 통해 얻은 생존자들의 증언, 1983년 발간된 「광양군지」와 1995년 출판된 「이경모 사진집」(눈빛 刊) 등을 근거로 노산의 은거지와 일제말기 행적에 대한 의문을 파헤쳤다.
증언자 가운데 현재 광양읍 읍내리에 거주하는 이용학(79.전 광양 교육장)씨는"일제말기에 부친이 경영하던 한의원에서 노산 선생을 자주 뵈었다"면서 취재자인김씨에게 광양읍 칠성리에 남아있는 노산의 은거지를 안내했다.
이 집은 해방 후 장차남(79) 할머니가 인수해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나지막한 3간 슬레이트 지붕의 이 집은 당시 초라한 초가집이었고, 조그만 갓방이 노산의서재였다고 이씨는 증언했다.
이씨는 "노산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받아온 민족운동가로 기억한다"면서 "해방직후 노산 선생의 지시를 받고 태극기를 여러 개 만들어 광양서초등학교 운동장에열린 군민대회에 참가했으며, 그때 노산 선생이 단상에 올라 강연을 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덧붙였다.
「광양군지」는 "노산이 광양경찰서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기록했고, 「이경모 사진집」은 해방되던 날 오후 광양경찰서 무덕전에서 시국수습 군민회의를열었던 노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고가 김씨는 이같은 증거를 토대로 노산이 조선일보 사직 후 해방때까지 백운산 및 광양에서 은거생활을 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2년 10월 홍원경찰서와함흥교도소에 구금됐다가 1943년 9월 기소유예로 석방돼 다시 광양에서 은거했다고일제말 행적을 밝혔다.
「경남문학」 발행인 정목일씨는 "국가 지원을 받아 경남 마산에 '노산 문학관'을 설립하려는 과정에서 일부 시민단체들이 노산의 친일행적을 시비삼아 문학관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면서 "노산이 친일행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일제말기 8년간 은둔생활을 했던 광양지역을 샅샅이 취재해 지난해 가을호에 이어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추가로 발굴해 공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잡지는 노산의 시조집에 실리지 않은 시조 '백계산 동백림'을 1988년광양에서 간행된 「마을 유래지」에서 발굴, 공개하기도 했다. 백계산 동백림은 광양시 옥룡면에 있는 산으로 고려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옥룡사 인근 동백숲을 일컫는다.
몇 년전 옥룡사에서 도선국사의 것으로 보이는 석관이 발굴된 바 있다. 노산이시제로 삼은 동백림은 도선국사가 풍수사상에 근거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경남문학」이 공개한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백계산 동백림에 봄이 하마 어지렸다 가슴속 옛 기억이란 이리도 쓰라린 건가 동백꽃 백년 핀데도 내사 어이 보겠나.
백계산 동백림에 꽃 한창 피거들랑 그대들 부디 와 눕고 앉아 거닐어 보세 내 차마 못 보는 뜻을 그제사 짐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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