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은 여자 소리꾼의 고장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소리꾼이었던 진채선, 경상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고창에서 활동했던 허금파, 국가지정문화재였던 김여란과 김소희가 고창 출신의 여자 소리꾼이다. 이만하면 가히 여자 소리꾼의 고장이라고 이를 만하다.
김소희의 고향인 흥덕면 사포리는 예전에는 매우 큰 어항이었다. 특히 조기철에는 조기 파시가 열려 흥청거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국악 공연단체들은 이곳을 빼놓지 않았다. 지금은 퇴락한 이곳에는 김토산이라는 소리꾼이 살았다.
김토산은 이날치의 소리를 배워 김성수에게 가르쳤다. 김성수는 다리를 저는 소리꾼으로 정읍과 김제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널리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판소리 애호가들 중에는 그의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포는 또 편재준의 고향이기도 하다. 편재준은 퉁애(단소보다 크고 퉁소보다 작은 악기)의 최고 명인으로 장님이었는데, 협률사 공연장에서 단소의 최고 명인 전추산을 만나 퉁애의 최고 명인이 되었다.
흥덕을 지나면 곧 선운사에 이른다. 선운사가 있는 선운리는 시인 서정주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운사 입구를 지나 4km쯤 더 가다보면 이르는 곳이 심원이다. 심원면 소재지에 이르기 직전 바닷가 쪽으로 있는 동네가 월산리인데, 이곳 사등마을이 바로 진채선 출생지이다.
진채선은 이곳 무당의 딸로 태어났으며, 신재효에게 판소리를 배운 뒤 경회루 낙성연 때 서울로 올라가 대원군 앞에서 소리를 하였다. 진채선의 소리를 들은 대원군은 진채선을 곁에 두고 사랑하였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간 진채선이 내려오지 않자 신재효는 진채선을 그리워하며 [도리화가]라는 노래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진채선은 끝내 신재효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곳 사등마을은 앞에서 말한 김성수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소리를 연마하던 곳이기도 하다.
사등마을 바로 앞이 검당마을이다. 검당마을은 지금은 동네라고 할 것도 없지만, 예전에는 큰 포구였다고 한다. 특히 이 포구는 소금의 생산지로 유명하였는데, 염전에서 햇볕에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든 것이 아니라, 가마솥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생산했다고 한다.
이곳이 이런 소금 생산지가 된 것은 옛날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가 선운산의 도적떼를 교화하여 이곳으로 옮긴 다음 생업으로 일러준 것이 바로 소금을 만드는 기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오래 동안 선운사에 소금을 바치며 살았다고 한다.
소금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물건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소금을 국가에서 관리하기도 하였다. 소금이 많이 나게 되자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번화한 곳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진채선의 어머니도 무업에 종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채선은 어떻게 진씨 성을 가지게 되었을까. 진 씨는 중인이었지만, 대대로 고을 아전을 맡아하던 내노라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채선이 진씨 성을 갖게 된 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몰락한 진씨 한 사람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무당과 부부의 연을 맺고 살게 되면서 채선이를 낳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곳 진채선의 생가터에는 진채선의 생가터라는 작은 표지만이 서 있을 뿐이다.
/최동현(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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