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 관해 나는 두가지 추억을 갖고 있다.
하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 1960년대 초반, 나는 내장산과 백양산 중간쯤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골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 때 집에는, 대부분 농촌이 그렇듯 ‘백구(벅구)’라 부르던 누렁이를 키웠다. 그 누렁이는 피아(彼我) 구분을 확실히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을 보면 사정없이 짖었고, 집안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리가 내린 기억으로 보아 늦가을이 아니었던가 한다. 당시 집마당에는 벼를 수확해 탈곡하지 않고 쌓아 놓은 볏가리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와 보니, 항상 반기던 백구가 보이질 않았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구는 신음하면서 볏가리 한 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내가 백구, 백구… 부르면 미친듯이 볏가리를 몇바퀴 돌다 또 쳐박혔다. 입에는 거품을 물고 있었다.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그 때 암놈인 백구는 새끼를 낳은지 얼마되지 않았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상태였다. 아마 배가 고파 쥐약먹은 쥐를 먹은듯 했다.
개고기 1년 1백만마리 식용
그 날 나는 어둠을 물리치며, 죽은 개를 마을밖 밭가장자리에 묻어 주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백구를 안고 걸어갈 때의 심정이란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이후 나는 살아있는 동물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버릇이 생겼다.
또 하나는 20대 후반의 일. 늦은 나이에 쫄병으로 군에 갔다 막 제대를 했을 무렵이었다. 당시 마음 고생이 심했던지 건강이 썩 좋질 못했다. 젊은 놈으로서, 진로도 불투명했다.
시골 집에서 일단 몸을 추스리며 책을 좀 보기로 했다. 그 때 아버지는 동네 사람을 시켜 개 한마리를 통채 잡아다 주셨다. 집에 있는 동안 몸 구완을 하라는 뜻이셨다. 유난히 눈이 많이 쌓이던 그해 겨울, 나는 그 개고기를 혼자 다 먹어 치웠다.
어머니가 들깨를 갈아, 갖은 양념을 넣어 만들어 주신 보신탕은 맛이 그만이었다. 당신은 목련존자를 믿는 불자(佛子)인 탓에 개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으면서도 자식사랑이 유별났던게 아닌가 한다.
각설하고 어제는 말복(末伏). 견공(犬公)들이 수난을 당하는 날이다. 꼭이 견공일까 마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복달임은 견공을 제일로 치니 어쩌랴.
개고기 합법화를 둘러싸고 찬반이 팽팽하지만 어제도 전국 6천여 보신탕 집이 문전성시를 이뤘을 것이다.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1년에 1백만마리, 약 1만2천톤의 개고기가 식용으로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소 돼지 닭에 이어 4번째로 많이 소비되는 ‘축산물’이다. 시장규모로는 약 2조원에 해당된다.
죽은 개를 위한 납골당까지
지난 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의 개고기 식용에 대해 ‘비열한 야만적 행위’라며 ‘한국상품 불매운동’을 들먹이기도 했다. 하지만 개고기는 이제 요리가 3백50가지나 개발되고 외국인들도 “Dog’s meat(개고기) 어디서 파느냐?”고 묻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 애견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애견인들이 개를 아끼는 것을 보면 ‘개팔자 상팔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개를 위한 통조림, 개옷, 개병원과 미장원은 기본이고 애완견을 위한 카페와 호텔도 문을 열었다.
죽은 개를 위한 관(棺)과 수의(壽衣), 납골당까지 등장했다. 애완견이 2백50만마리에 이르고 애견산업은 1조원으로 추산된다.
보신탕과 애견산업이 묘하게 오우버랩되는 말복이었다.
/조상진(본사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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