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 대종사를 뵙고 내 몸과 마음을 모두 이 회상에 바쳤다. 나는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한 말씀도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것을 대의로 믿었다. 나는 일생동안 아무 일도 한 일이 없다. 다만 이 법 만나서 사심 없이 일생을 지냈을 뿐이다.
우리는 법을 위해 몸을 잊고 공을 위하여 사를 놓는 위법망구(爲法忘軀) 위공망사(爲公忘私)를 표준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도인의 공부길이요 전무출신의 정신이다.’
1902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성산(誠山 成丁哲)종사는 천석꾼의 아들로 승마를 즐기는 등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부친의 사망으로 하루아침에 집안이 몰락하고 만다.
가난하고 불우했으나 착실하고 근면했던 그는 결혼 후 21세 때 전라도로 옮겨와 형수의 조카 조철제가 교주로 있는 강증산교의 한 지파인 태을도에 입교해 경제담당 간부로 있다가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된다.
출가 이후 성산종사는 영산성지와 익산총부의 재무·산업부 살림을 도맡아 지극정성을 다했다.
참다운 스승을 만났다는 기쁨에 대종사와 정산종사 그리고 대산종사에 이르는 역대 종통을 한결같은 신성으로 받들어 한 생애를 교단을 위해 헌신, 교단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성산종사의 삶에는 종교의 성직자들 중 자칫 어설픈 글재주나 앵무새 설교를 능사로 아는 이들을 크게 깨우쳐주는 무언의 약침(藥鍼)이 있다.
그는 ‘그 마음에 한 생각의 사(私)가 없는 사람은 곧 시방 삼계를 소유하는 사람이니라. 그대들이 나의 법을 붓으로 쓰고 입으로 말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도 중한 일이나,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만고 후세에 이 법통이 길이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은 더욱 중대한 일이니, 그러하면 그 공덕을 무엇으로 가히 헤아리지 못하나니라.
스승이 법을 새로 내는 일이나, 제자들이 그 법을 받아서 후래 대중에게 전하는 일이나, 또 후래 대중이 그 법을 반가이 받들어 행하는 일이 삼위일체(三位一體)되는 일이라, 그 공덕도 또한 다름이 없나니라’ 하신 대종사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 후진의 법문 간청에 성산종사는 보기 드물게 친히 붓을 들어 일생동안 마음에 간직해온 좌우명을 썼다.
‘오늘도 나를 찾고 내일도 나를 찾자. 오늘도 나를 놓고 내일도 나를 놓자’는 말씀은 너무 평범하고 쉬운 듯 하지만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비범하고,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법문이다.
일 평생을 대의에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산 성산종사는 1976년 보사부장관상과 198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받았으며, 1987년 4월26일 열반에 들었다.
/최남호(원불교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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