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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연극 40년, 그 부침의 세월] (1)태동과 성장

 

 

●●●전북연극 40년, 그 부침의 세월●●●

 

전북연극의 역사는 탄탄하다. 60년대 초반, 이 지역에 연극의 씨앗이 뿌려졌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지역극단들의 탄생과 소멸이 악순환의 고리로 이어졌다하더라도 그것이 가져온 양적 질적 변화는 오늘의 전북연극을 있게 하는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오는 9월 26일부터 10월 1일까지 전주에서는 제 20회 전국연극제가 열린다. 지난 87년에 이어 두 번째 개최되는 전국연극제는 우리 나라 연극인들의 가장 큰 축제마당이라  할 만하다.

 

이를 계기로 한국연극사의 한 축인 지방연극의 중심을 지켜온 전북연극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침체와 위기, 변화와 절정의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른 전북연극사의 면면은 전국연극제가 개최되는 이 시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번 연극제가 전북연극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1) 전북연극의 태동과 성장/1960∼70년대

 

'내 몸둥아리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상장(喪章)을 둘러 마지막의 내 호흡이 끊어진다면 나와 동일한 다른 운명의 소유자가 나의 독백을 이어받아 나의 독백은 두고 두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전북연극을 잇게 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동화선생(1911-1978)이 59년에 발표한 작품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의 한부분이다.

 

그의 대표작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박동화  작·연출)가 전주극장과 이리삼남극장에 올려진 것이 1961년. 전북 연극의 막이 비로소 열렸다. 당시 연극판은 전북대 극예술연구회가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연극은 6월 전북대 개교기념일이나 전라예술제 기념공연이 거의 전부. 한해 2∼3편이 올려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당시의 열악한 문화환경에서 그만한 무대를 올리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게다가 1964년 핵심단원들의 졸업과 군입대로 상당수의 단원이 빠져나간 전북대 극예술연구회는 극단의 존속마저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이때 박동화 선생이 던진 카드는 희곡 ‘두 주막’으로 전국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는 것. 그는 이와 함께 연극계의 새 정비를 결심, 당시  무대 미술을 담당했던 하반영씨와 방송극작가 조인환, 이봉섭, 최호영씨 등 연극 동호인들의 도움을  받아 민간극단 ‘창작극회’를 탄생시켰다.

 

창단멤버는 대부분이 극예술연구회출신 졸업생. 때문에 창작극회의 창단을 전북대 극예술연구회가 창단된 1961년으로 잡기도 한다. 박동화선생의 의도는 맞아 떨어졌다.

 

이종호 고영자 박길추 손옥자 권기홍 등이 출연한 ‘두  주막’은 64년 5월, 국립극장에서 열린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해 창작극회는 일약 전국적인 극단으로 부상하게 됐다.

 

60년대 연극은 3시간이 넘는 대작 ‘바다는  노하고 산은 울었다’(박동화 작·연출)를 시민문화관에 올리며 마감된다.

 

전북의 연극사에서 박동화선생의 존재는 보물과도 같다. 이 지역 연극의 시작과 중심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창작극회와 전북대 극예술연구회 이름으로 올려진 20여편의 공연에 박동화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1961)로 시작한 그의 작품은 ‘여운’(1962) ‘정직한 사기꾼’(1962) ‘왜 싸워’(1963) ‘두 주막’(1964)  ‘대춘향전’(1965) ‘우리들의 뒷모습’(1967) ‘용감한  사형수’(1969)‘망자석’(1970)등으로 이어지면서 연극무대를 풍요롭게 했다.

 

박동화의 작품사는 전북 연극사 절반을 차지할만큼 남긴 자취가 크다.

 

70년대 들어 이때부터 수전증이 심해 구술로 작품을 완성해야했지만 ‘공사장’(1971) ‘느티나무골’(1972)부터 ‘등잔불’(1978)에 이르기까지 악조건속에서도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이들 작품을 통해 현대문명의 발달로 공동체 정서가 사라지는 안타까움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성 상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을 다뤘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연극인들은  강신문 강주순 김병희 문치상 박길추  박태웅 송연 손경자 손예선 손옥자 양희영 오수정 오태식 이동윤 이명수 이보상 이종호  이현 이훈태 정광자 정석주 최규상 최동욱 한난수 등이었다.

 

70년대로 이어진 전북연극판은 더욱 활기를  얻었다.
특히 73년은 특별한  해였다. 박동화선생의 회갑기념공연으로 도내 미술인들이  전시회를 열어 제작비를 지원,  ‘산천’(박동화작·연출)을 3일간 무대에 올렸고 최대 관객수를 자랑했다.

 

이 공연엔 박길추 곽영희 김민철 송창진 신상만 문치상 이종호 김가현 전성복 박승구 이기수씨가 무대에 섰고 최선 무용단이 출연하기도 했다.

 

또 하나의  성과는 ‘버드나무촌’(박경창 작/문치상  연출)이 전국새마을 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 이  대회를 계기로 74년 ‘생수’(박동화  작/신상만 연출)가 최우수상을, 75년 ‘농촌봉사대’가 동상을 받는 등 전북지역 연극인들의 수상은 뒤를 이었다.

 

70년대에는 강대승 강부상 권기홍 권태호 김송미 김성두 김성희 김인중 김의석 김종남 김중곤 김희숙 문치상 박길추 박상근 박승구  박승자 박의원 박환창 백용현 소진영 신상만 신정기 신정규 오현주 유영규 윤양현 이가영  이기수 이명선 이연수 이호범 장영숙 전성복 정종선 조연주 진봉희 한옥남 한혜영 허윤경 홍덕순 황규 등이 활동했다.

 

75년에는 문치상씨가 비사벌예고를 중심으로 ‘비사벌극회’를 창립, 공연무대를 크게 발전시켰다. 특히 이 극단은 여자배우를  길러내는 창구가 되어 여배우기근현상을 해소하는데 일조했다.

 

1970년대를 마감하면서 전북의 연극은 변화를  맞게 된다. 박동화선생이 남긴 결실이랄 수 이도 있을 이 변화는 여러 민간극단과 관립극단 탄생으로 이어지고 격동의 80년대가 그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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