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가셨다. 대쪽 같이 곧고 맑은 정신으로 세상에 가르침을 주셨던 작촌(鵲忖) 조병희(92, 趙炳喜)선생.
선생이 떠나신 17일 밤. 노환으로 기력을 놓으신지 오래였지만 사람들은 선생의 부음소식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황망해했다. 선생이 쌓아온 세상과의 인연 아흔두해의 끈은 2002년을 보내는 끝머리에서 그렇게 끊어졌다.
이 시대의 어른 작촌 조병희선생. 그는 전북의 산역사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향토사학자이자 지조있는 서예가이며 시조시인인 선생은 평생을 이 지역 역사를 위해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젊은 시절 안았던 화가에의 꿈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가 있던 해에 충남 강경에서 태어났다. 강경역 옆 채운산 중턱쯤에 걸쳐있는 '깐치멀'이 선생이 태를 묻은 곳이다. 선생은 다섯 살때 전주사람이 됐다.
부친이 전주제일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하면서 전주로 이사를 한 덕분이다. 그 뒤 여든일곱해, 선생은 전주에서 성장하고 세상을 배우고 익혔으며, 이지역을 바로 세우는일에 기꺼이 앞장서온 지킴이로 평생을 보냈다.
전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전주고)를 졸업한 선생은 육상과 글쓰기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선생의 꿈은 따로 있었다.
화가가 되는 것을 늘 꿈꾸었던 그는 일본미술학교에 유학할 뜻을 세웠지만 어려워진 집안 형편 때문에 유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했다.
그 첫직장이 관촌금융조합의 서기였다. 그 시절부터 선생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작은 것 하나 소홀함없이 기록으로 남겨둔 그의 열정 덕분에 오늘에 이르러 복원된 지역 역사는 적지 않다.
철저하게 기록한 향토의 역사
향토사가로서 선생이 남긴 궤적이 깊은 만큼 서예가로서 시조시인으로서의 활동도 돋보였다. 다섯 살 되던해부터 조부로부터 천자문과 소학 논어를 배우고 붓을 손에 들었던 선생의 서예 이력은 길고 길었다.
늘 지조와 곧곧한 정신을 지켜왔던 선생은 '서(書)는 결코 예(藝)가 아니라 도(道)'라고 강조했다. 예술의 경지가 아니라 도의 경지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서예는 선생의 평생 벗이었다. 모양을 앞세우지 않으면서 인간의 정신과 진리를 표현하는데 가치를 둔 선생의 글씨는 비문으로, 현판으로 지역 곳곳에서 숨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선생 스스로는 서예가임을, 시조시인임을 내세운 적이 별반 없다.
"취미 일뿐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저 어깨 너머로 익힌 얄팍한 실력에 마음을 실어내는 것이다"고 말해왔던 선생은 한시를 짓는 일을 특별히 즐겨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작품을 써냈다.
40여년동안 한결같이 지켜왔던 선생의 일기쓰기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일이었다.
외삼촌 가람의 영향받아 시조시 쓰기 시작
선생이 시조시인이 된 것은 외삼촌인 가람 이병기선생과의 특별한 관계가 인연이 되었다. 선생은 가람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가람의 영향을 받아 선생은 시조시를 쓰기 시작했고 78년 구름재 박병순씨의 권유로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89년에 펴낸 '새벽녁 까치소리'는 그의 오랜 시작생활을 담은 첫 시조집이다.
젊은 시절, 전국방방곡곡을 찾아다녔던 선생은 전주의 향토사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자신이 기록으로 남겨놓은 수많은 자료들, 기억속의 일들을 꼼꼼하게 챙겨 펴낸 '완산고을의 맥박'은 선생의 열정이 남긴 소중한 역사다.
선생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전하고 남겨두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다. 전주시 다가동 천변에서 살포시 내려와 앉은 선생의 고택에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선생은 늘 환한 낯빛으로 손님을 맞아주었다.
평생 모은 고서 우석대 기증
오랜세월 모아온 옛책과 문서만도 수천여종. 선생은 그동안 서울의 대학이며 각 기관에서 온갖 조건을 제시하며 요청해왔지만 끝내 거절했던 2천 3백여권의 고서를 99년 우석대 도서관에 기증해 지역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선생은 지역의 산역사이자 어른이었다. 관혼상제부터 비문을 찾고, 이미 잊혀진 지명과 위치를 찾는 일, 인물을 찾아 그의 생애를 추적하는 일까지 작촌선생의 기억과 자료는 어느 한부분 소홀함없이 그 자체로 역사가 되었다.
때로는 독설과 비판으로, 때로는 격려와 따뜻한 관심으로 이 지역을 굽어보아온 선생을 이지역의 후학들은 지난해 ‘전북의 어른’(KBS전주방송국 제정)으로 봉정했다.
그후 1년, 노환으로 기력이 쇠잔해진 선생이 병상에서 지내는동안 후진들은 선생의 작품을 모아 시조집 ‘해거름에 타는 꽃불’(이삭)을 만들어 올렸다.
지상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병상에서 시조집을 받아든 선생이 그날 고마움으로 전했던 환한 웃음을 우리는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살아있는 지역의 참역사였던 선생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삶의 궤적이 굵고 깊다.
발인은 20일 오전 10시 전주 예수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리며 장지는 이리시 삼기면 연동리 선영. 유족으로는 부인 이종팔씨(92)와 문형 안형 정형 신형 욱형 숙형 경자씨등 5남 2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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