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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작 "협죽도"

 

 

작년 여름, 우리 집에는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났다.

 

교회 집사님이 분식(分植)해 주면서 녀석에 대한 자랑도 함께 따라왔었다. 꽃이 오래오래 피어나고, 체리 향 신사라느니... 녀석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었다.

 

아직 가꾸지도, 꽃을 피워보지도 않은 초면이라, 추상적으로만 들리는 이야기들을 귀담아 듣는 척 했지만, 그건 순전히 인사치레일 뿐 그 내용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칭찬들 속에 정작 꼭 있어야할 녀석의 이름이 빠져 있었던 사실을 몇 일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별 수없이 녀석의 이름도 모른 체로 한 가족 되기 위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층으로 오르는 층층이 계단 왼편으로 제일 높은 곳에 터를 잡아 주었다. 이제부터는 강한 생존의지로 먼저 식구 된 녀석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으며, 스스로의 자생력을 키워가야만 한다.

 

분식 된지 얼마 안 돼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처지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녀석은 어려움이 적잖을 것이다. 숨막히게 내리쬐는 태양열도, 뿌리 체 뒤흔드는 사나운 강풍도 온몸으로 견디며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그렇게 강한 불굴의 의지를 키워오던 상강(霜降)지난 어느 날, 예년보다 빠르게 들이닥친 추위가 크게 앙탈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굳은 절개를 지켜가고 있던 국화들이 또 한해를 접으려고 제 몸을 바싹 말리며 몸무게를 줄여가고, 그 밖의 화초들도 자신의 체온을 지켜내려고 육신을 바짝 움츠리고 있었다.

 

예고 없이 몰아닥친 한파를 피해 거실로 입주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거실에는 난·소철·만냥금·철쭉·쟈스민·알로에·선인장 같은 식구들이 자리하는 바람에 더욱더 좁아졌지만, 아직 발 디딜 틈 정도는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엄동설한이 매서워도 우리 집 거실이나 주방은 보일러의 동맥이 차단된 체, 그 흐름이 끊겨있어 늘 추울 수밖에 없었고, 그런 환경 속에 길들여진 우리가족들은 누구라도 아내의 알뜰 정책에 인내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새 식구인 녀석에겐 아내의 자그마한 배려가 주어졌다. 가스렌지 바로 옆자리였는데, 그곳은 거실을 지나 주방에서도 제일 깊숙한, 월동하기엔 그래도 좀 낫다 고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식사준비를 하는 잠깐이라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가스렌지 부근의 위치적 배려는 아주 각별한 것이라 할 만 했다.

 

그런 덕분이었던지, 녀석은 추운 겨울을 무사히 견디고 건강한 모습으로 새봄을 맞아 식구들 모두를 기쁘게 해줬다. 특별하게 보호받은 적 없어도 주어진 환경을 잘 참고 이겨낸 끈질긴 자생력,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 집안의 율법(律法)과도 같은 강인한 정신이라 할 만한 가치였다.

 

이제부터 녀석을 위해 쏟는 관심과 사랑은 제 스스로를 잘 지켜낸 보상 같은 것으로, 제일먼저 녀석의 족보를 찾아보기로 했다.

 

잘 가꿔진 정원이나 화원을 기웃거리며 녀석의 혈통을 찾아 나섰으나, 보름정도를 헤맸어도 허사였다. 녀석을 닮은 모습마저도 찾을 수 없이 공전만 거듭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매일 같이 집에 있는 시간 대부분을 투자해가며, 녀석과의 정분을 넓히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녀석을 향해 의미 없는 넋두리 같은 푸념 하나를 늘어놓고 있었다.

 

"너는 도대체 국적이 어디란 말이냐?" 그 때 순간적으로 식물도감을 생각해냈다. 곧바로 식물도감을 샅샅이 뒤진 끝에서야 녀석의 이름이 "협죽도(夾竹桃)"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녀석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는데도 성공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녀석에 관한 기록을 축적했다.

 

녀석은 터전에 뿌리내린 선대로부터 짧게 자란 후에 자손 셋을 퍼트렸다. 가지런히 30도 각도로 벌려가면서, 어른들의 키를 넘길 정도로 하늘을 향하여 높다랗게 뻗어 올랐다.

 

잎은 약간 두꺼운 편인데 길다란 선형이며, 상하로 약 5쎈티미터 간격을 두고 3장씩 규칙적으로 돌아나는 질서 같은 것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라나는 모습에서 녀석은 곧고 꿋꿋한 기상(氣像)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을 나면서 맨살 앙상할 줄 알았던 녀석은 겨우 내내 늘 푸른 상록수의 얼굴이었다.

 

드디어 개화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녀석에게는 초산(初産)과도 같은 첫 개화가 다가오자 호기심보다는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이 앞서고 있었다.

 

가지 끝마다 맺힌 수많은 꽃봉오리들이 눈의 피로를 씻어줄 것처럼 생기로 넘쳐나고, 지난밤 내 꿈길에 잠시 머물렀던 녀석은 화단 속 백미(白眉)로서 군중들의 눈길을 독차지 하고있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환한 웃음을 내보이고 있었는데, 어설픈 미동(微動)도 못 견디고 몸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불행한 녀석들을 수없이 목격했던 게 오늘의 현실이었다.

 

'개화' 그 집념 하나로 365일 낮과 밤 굽이굽이를 달려와 애타게 그리던 꿈을 여는 그 목전에서, 천길 아래로 낙화하는 최후 모습은 무척이나 슬픈 장면으로 남아있다.

 

꽃봉오리 속에 빨갛게 꽃심 머무르던 석 달여(餘) 동안, 시기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우리가정에 꿈과 희망은 물론 곱고 아름다운 마음까지도 더불어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세상에 나온 갓난아이가 움켜쥐었던 손을 펼쳐주듯 핑크 빛 꽃잎들이 한 겹 두 겹 열리면서 하늘의 메시지를 수신하고 있다. 하늘의 신성한 기운들이 만개한 화신의 몸을 통해 집안 구석구석 스며들고, 마치 체리 향과 흡사할 것 같은 천상의 향수를 집안 곳곳에 뿌려대고 있다.

 

그 곁을 지나는 가객(佳客)마다 녀석의 해맑은 미소 앞에 발길을 멈춰 세운다. 향기에 취하고, 모습에 반하면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이가 없다. 어느새 소식 듣고 찾아들었던 벌·나비들의 날갯짓마저 조심스러운 한 낮이 소리 없이 흐른다.

 

어떤 의식이 오늘 이보다 더 아름답고 장엄하랴!

 

오늘 이 엄숙한 순간들을, 영원히 퇴색 없는 내 마음 속 인화지에 담아 오래 오래도록 걸어두기로 했다. 

 

머지않아 시절을 뒤로한 체, 어느새 땅을 헤집고 나와버린 녀석의 분신(分身)을 떼어가 기를 지인에게, 나는 꼭 한마디만 일러두고 싶다.  "이 녀석 이름은 '협죽도'입니다."

 

/박종기(2003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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