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기차게 두드렸던 문이 끝내 열리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날인가부터 불현듯 마음 한켠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복수란 무서운 것이어서 나는 한참 동안 복수의 순간을 꿈꾸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딘 시의 칼을 갈고, 헐거워진 정신을 다시 수습하면서 그렇게 십여 년을 보냈다. 그 덕에 나는 이 질긴 침묵의 시간을 버텨올 수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원고를 보내면서 소감을 함께 보낸다거나 보낸 이후 호기롭게 술을 마실 여유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살아 남기 위해, 그리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며 시를 썼다.
나에게 시는 복수의 도구였고, 나를 살아 있게 만들었던 힘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복수를 위해 칼을 빼어 들었을 때, 이미 날은 무디어 있었고 칼집에는 어디선가 왔는지 모를 꽃씨가 떨어져 조금씩 싹을 티우고 있었다.
끈질기게 나를 괴롭혀왔던 복수의 끝은 그렇게 허망했다.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작 복수야말로 나를 버티게 만들었던 힘이었다는 사실을,
올해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때문인지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원고를 보내고 난 후에도 유난히 마음이 설레었다. 긴장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점점 더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연락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나의 복수는 달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면서 나도 모르게 복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어렴풋하게나마 시를 쓰는 일이 복수가 아니라 생명을 향한 몸부림이며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제 나는 서툴게나마 다시 시작할 것이다. 아직 나의 복수는 끝나지 않았으므로, 더 좋은 시를 쓰는 것만이 나를 이 길에 들어서게 만들어주신 이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즐거운' 복수리라. 시를 쓰는 일이 복수라는 치졸함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주었으므로, 그것만이 나에게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깨닫게 해주었으므로,
이 자리에 설 수 있기까지 참으로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의 정성어린 격려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 결코 설 수 없었으리라.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한다.
약 력
1967년 전주생
전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현대시)
현재 전주대 교양학부 객원교수
/장창영(2003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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