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픽션
- 디스토피아를 찾아서 -
1.
아버지의 구속 소식을 전해 듣던 날 나는 수(秀)와 함께 이국의 호텔 안에 있었다. 아버지가 구속되었다고, 혹시 알고 있었느냐고 수화기 저 편에서 동생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나는 어쩌면 잠결에 허튼 소리를 들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나중에 다시 전화할께요.
내게 별다른 정보가 없음을 깨달은 동생이 맥빠진 목소리로 짧게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머리 속을 재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짧은 단상들이 어쩔 수 없이 나를 혼란으로 이끌고 갔다.
정지된 실물 크로키처럼 재빠르게 지나가는 몇 개의 단상들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견고하게 서 있었다. 아버지는 흡혈귀다. 무언가에 기생하여 끊임없이 빨아먹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아마도 상대는 선금을 주고 원고를 떼였거나 어떤 종류의 중대한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 당한 자일 것이다.
그의 험난한 고통의 이력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심원하다못해 뿌리째 박혀 헤어나지 못하는 오랜 간난함을 통털어서 나는 그것들을 불시착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한 마리 벌레가 된 것처럼 자신이 징그러워지기 시작했다.
2.
한 낮의 태양은 크고 위대했다. 기차는 도심의 변두리 한 켠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 떠났다. 미로처럼 구부러진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나는 뜨거운 대로 위에 서 있는 익명의 인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잔인하게 작열하는 태양 빛을 따라 걷는 동안 세계는 목마른 침묵에 휩싸여 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흐린 먼지를 뒤집어 쓴 플라타나스 잎들 속에서 가볍고 신속하게 노란 택시 한 대가 나타나 멈추어 섰다.
- P교도소로 갑시다.
짧고 건조한 내 억양에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힐끗 이 편의 얼굴을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서 얼핏 연민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느낌이 묻어져 나오는 것을 나는 애써 외면하지 않았다. 자동차 앞쪽으로 언덕을 오르는 마을 버스 한 대가 힘겨웁게 아스팔트 위를 오르고 있었다.
이미 만원이 되어 버린 좁은 버스 안에서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에 섞여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손잡이에 매달린 젊은 여인의 눈동자가 무심히 이 편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여인의 좁은 등에 업힌 잠든 아이의 꺾여진 고개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를 업은 여인의 얼굴은 더위 탓에 반쯤 일그러져 있었다. 여자의 지치고 고단한 얼굴은 젊은 날의 내 어머니를 닮았다. 대기실 난로 앞에서 스물 세 살의 젊은 어머니는 이제 막 젖을 뗀 어린 아이를 둘러 업고서 젊은 아버지의 면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날은 억수로 추븐디 면회는 댕기야 쓰겄고 어린 너거를 엎고 순서를 기다릴 때는 을매나 춥던지. 발이 꼭 언 동태마냥 얼얼한디 똑 죽을 맘으로 늬 아부지 옥바라지를 댕겼다 아이가.
어머니는 젊은 날을 떠올릴 때마다 유난히 추웠던 교도소 면회대기실을 회상하곤 했다. 고향에서 식을 올린 후 서울로 온 지 얼마 안되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옥바라지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한 번은 정 살기가 힘들어가 늬 아부지 서가를 죄 뒤져 이광수 전집을 찾아 들고 청계천에 내다가 안 잽혔나. 그 때만 해도 책이 돈이 되는 시절이라, 금박으로 테를 두른거라 좁은 소견에도 집안에 있는 물건 중에 그래도 제일로 값이 나가겠지 싶었제. 청계천 헌 책방에 들어가 아무나 주인을 붙잡고 다짜고짜 통사정을 했제. 사정이 있어가 부득이 책을 잽혀야 쓰것는디 돈이 되는대로 꼭 배로 쳐주고 찾으러 올 테니까네 그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꼬 신신당부를 한기라. 그 길로 책을 잽히고 얻은 돈으로 중고 미싱을 사다가 부지런히 바느질감을 얻어 근근히 너를 멕이고 입히고 안 했나. 참말로 그 때 생각허믄 인자도 눈물이 난다.
그래 겨우 책 찾을 돈을 마련했는데 어쩌다보니까 딱 책 한 권 값이 모자라는 거라. 느그 아부지 출소 날은 낼 모레로 다가오고 책 잽혀서 돈을 썼다는기 발각되믄 불호령 떨어질 거이 분명하고 해서 얼마나 맴이 졸이든지. 하는 수 없이 책방 주인을 찾아가 사정을 했제. 책값을 마련하긴 했는데 어찌하다보니까네 딱 한 권 값이 빈다꼬, 오늘은 그냥 돌려주시면 내 은혜를 잊지 않고 꼭 마저 갚아드리겠다꼬.
그랬더니 책방 주인이 내 얼굴을 한참동안 요래 훑어보더니 하는 말이 아지매요, 무슨 사정인줄은 몰라도 아지매 얼굴을 보니 참말로 이런 데 나올 분이 아인데 안됐심더. 괘념치 마시고 그냥 가져가십시요 이라는기라. 내가 어찌나 고맙든지 아마 평생 그 아저씨 얼굴을 못 잊을 끼다. 그 길로 책을 받아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펑펑 안 울었나. 왜 그런지 끝도 없이 자꾸만 눈물이 안 나오더나......
기억은 빠르게 햇볕 속에서 이내 부서져 버린다. 택시는 정문 앞에 나를 내려놓고 간단히 떠났다. 정문 입구는 작은 소읍을 연상시킨다. 작은 국밥집과 때묻은 행상들, 그리고 먼지에 덮여 윤기를 잃은 흑백의 풍경들이 낡은 셋트장처럼 공허해 보인다. 숲 사이로 난 하늘빛은 창백하도록 푸르다. 정문 앞쪽에서 면회소로 향하여 숲 속으로 난 작은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소풍을 나온 사람들처럼 경쾌해 보여서 나는 순간적으로 조금 어리둥절해진다.
한 무리의 사람들 틈에서 경쾌한 차림의 남녀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서 숲길을 스치듯이 걷고 있다. 무릎 아래께가 찢어진 연한 청바지 차림의 여자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가 어깨동무를 하고서 숲길을 걷고 있는 모습은 다정해 보인다.
교도소 안의 면회소로 향하는 여로가 아니라면 그들의 행보는 누가 봐도 다정한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쯤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들 일행중의 누군가가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감옥소 안에 갇혀 있는 듯. 그들의 분별 없는 옷차림에서 나는 엉뚱하게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항공기의 거듭된 연착으로 인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컴컴한 새벽이었다. 공항을 빠져 나오자 울긋불긋한 원색의 복장을 한 두 명의 여인이 환히 미소지으며 목에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그들의 환영의식 속에는 열대의 음습한 열기가 그대로 배어 나와서 비로소 이국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다.
거리에는 새벽녘이 되어서도 쉽사리 식지 않는 열대의 더운 기운이 환생한 원주민들처럼 우리를 맞이했다. 셔틀버스를 타고 숙소인 호텔로 이동할 때에 수가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습지 않아?
-뭐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자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는 거 말이야.
수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우리의 비밀 여행을 생각했다. 차창 밖 어둠 속으로 도마뱀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네모나게 설계된 전신주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지나쳐 갔다. 숙소인 호텔의 실내에 들어서자 창가에 비현실적으로 화려한 원색의 열대과일들이 시원의 방문객을 환영하듯 신비롭게 놓여 있었다. 수가 창가로 다가가 붉은 빛이 선명한 이름 모를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먹어볼래?
나는 수가 먹다 만 붉은 과일을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선악과 의식을 치루었지만 네모난 전신주를 타고 와서 여자를 먼저 유혹했을 도마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맛이 없어.
나는 수에게 과일을 도로 건네주며 말했다. 현란한 빛깔의 열대과일들은 결정적인 달콤함이 빠져버린 것처럼 왠지 싱거운 맛이었다. 수는 과일을 호텔 방 아무데나 내던져 버렸다. 수와 나는 멀고 긴 여행을 떠나왔다. 수가 내게 처음 여행을 제안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를 둘러싼 단단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선악과를 먹고 나자 수와 나는 원죄를 알아버린 사람들처럼 갑자기 조금 어색해졌으므로 냉장고에서 양주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눈물이 조금 나오려 했지만 이내 평온한 기분이 되었다. 취기로 몸놀림이 자유스러워지자 수와 나는 침대로 들어갔다.
수와 나는 어색하고 뻣뻣한 자세로 나란히 누웠다. 처음에 나는 수를 천천히 애무한 후 정상위로 결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애무는 부자연스럽고 불편했으며 내 얼굴은 저절로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러지마. 이제 우린 곧 하나가 될거야. 나는 고개를 돌리려는 수를 달래듯 속삭이며 말했지만 수는 긴장으로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나는 이미 단단해진 내 몸을 억지로 수에게 밀어 넣으려고 했지만 긴장으로 굳어진 수의 몸은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몸은 중요한 과제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다급하게 허둥거렸지만 그럴 수록 비명에 가까운 수의 목소리가 나의 시도를 방해했다.
그만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나는 수의 몸을 뒤집듯이 반듯이 누이고는 뒤쪽에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뒤쪽에서 거칠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수의 몸도 따라서 함께 출렁거렸다. 갑자기 수의 입에서 찢어질 듯 고통스러운 파열음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진입했다. 자유로 가는 길은 언제나 낯설고 껄끄럽다. 수와 나는 영혼이 날아가 버린 벌레들처럼 딱딱하게 교미했다.
- 이제 끝났어.....
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전분투 끝에 수와 내 몸은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가 수에게서 천천히 몸을 떼어내자 흰 침대 시트에 군데군데 핏자국이 얼룩처럼 드러났다. 마치 누군가에게 한꺼번에 유린당한 것처럼 빈 껍데기만 남은 수의 몸은 가벼워보였다.
천천히 일어나 욕실로 걸어나가는 통로 위로 수의 찢긴 가랑이 사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선명한 혈흔들은 비로소 내가 서 있는 곳을 명징하게 깨닫게 해 주었다. 트윈 침대에서 욕실입구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진 혈흔들을 바라보며 나는 엉뚱하게도 교도소 안에 갇힌 아버지를 상상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거라는 기묘한 희망이 나를 들뜨게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나는 수를 혼자 버려 두고 호텔을 떠났다.
3.
둥글고 흰 모자를 쓴 헌병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나서 면회 신청서를 작성한 후에 나는 대기표를 받아 면회대기실로 들어섰다. 예닐곱평 정도의 좁은 대기실 안은 불량한 냉방 시설로 인해 찜통 속을 연상시킨다. 무자비한 더위 속에서 허공을 회전하는 두 개의 낡은 선풍기는 턱없이 무력해 보인다.
더위에 지쳐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지만 면회를 기다리는 설레임 때문인지 대기실 안의 풍경은 그런 대로 들뜬 술렁임이 느껴졌다.
나는 수인번호가 적힌 쪽지를 펴보았다. 천백십사번. 아버지는 하루에 한번 면회가 허용되는 미결수였다.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대기실 안 쪽에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챙이 넓은 흰 모자에 흰 원피스를 받쳐입은 한 여인을 보았다.
목선을 타고 흐르는 부드러운 곡선과 단정하게 틀어 올린 검은 머리칼이 챙 넓은 모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여인의 얼굴이 왠지 미인일거라고 추측하게 했다.
반쯤은 음울함이 깔린 면회 대기실에서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인의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이채롭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은 여인의 환한 옷차림에 이따금 힐끔 힐끔 눈길을 주곤 했지만 여인은 그들의 시선과는 무관하게 다만 혼자만의 상념에 잠긴 듯 물끄러미 앉아 손수건으로 흐르는 이마의 땀을 찍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천 사백 육십 오번, 천 사백 육십오번 면회소로 와 주십시오. 천 백 사번... 벽 면 위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굵은 목소리로 재차 수감 번호가 흘러나올 때마다 번호가 불린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들뜬 환호성과 아직 호명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탄식들이 뒤섞여 어수선하게 대기실을 교차했다.
나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으므로 무료함을 달래듯 대기실 사방 벽면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출입문 정면으로 교도소 안내와 홍보용 사진들이 꼼꼼하게 붙어 있었다.
교도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재소자의 인권 보호를 위한 우리의 방침... 거기에는 재소자들에게 제공되는 세끼의 식단과 내부 배치도까지 상세한 해설을 덧붙인 안내문이 게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홍보용 사진들은 이미 설치된 지 오래된 낡은 것들뿐이어서 마치 오래된 구호처럼 아득해 보였다.
재소자 권익 말도 마라. 나와 있는 사람도 멀거니 눈뜨고 당하는 시상인디 누굴, 가막소 안에 있는 사람들 권익을 다 지켜준다 말가. 내가 그 안의 꼴을 한 두번 봤노. 아버지를 옥바라지하고 돌아온 날이면 어머니는 늘상 끝도 없이 되풀이되는 혼자만의 푸념을 이렇게 되뇌이고는 했다.
그기 너거가 두살 묵던 해였는갑지 싶은데 햇빛 쨍쨍 내리쬐는 한 여름에 보안법위반으로 삼년을 때려 맞았는데 그 안에서 얼마나 목이 타겠노. 그래가 내가 커다란 수박 한 덩이를 사가 계란 한 판하고 영치금하고 같이 안 넣었나. 그래놓고 한 삼일 지나 새끼를 등에 업고 고생고생해가 다시 면회를 가보니까네 느그아부지 얼굴이 더위에 쩔어가 똑 반쪽이 된기라. 그기이를 보니께 마음이 심란하지 않겠노.
그랬더만 거까지 찾아간 사람한테 턱 한다는 소리가 동료들 다 고생하는데 나만 수박이 웬 말이냐고 면회실 간수가 힐끔 쳐다 볼 만큼 호통을 치는거라. 그러면서 느그아부지 하는 말이 수박을 받은 대로 그 자리서 깨부솨 버렸다고 안 하나. 내가 기가 막혀 눈물도 안 나오더마. 평생을 식솔들에게는 무심한 양반이라. 본디 청천벽력 같은 양반이긴 하지만도 내가 언제 저런 인사와 한 시절을 다 살아 냈노 싶더라.
어머니의 오랜 푸념을 들으면서 나는 아버지의 서가에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던 어느날의 성난 파도와 같은 책들을 떠올렸다. 하루해가 몹시도 지루하게 느껴지던 나른한 봄날이었다.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한 낯선 두 명의 남자가 집으로 찾아온 것은 어스름해질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아버지, 어디 가셨니?
유난히 눈매가 서늘한 검정 자켓의 사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기나긴 부재중이었고 그들이 아버지를 찾아온 날은 내 여덟번째 생일날이기도 했다. 전날 밤 아버지는 모처럼 집으로 한 통의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언제나 부재중인 수화기 너머의 아버지에게 생일선물을 사달라고 졸랐다.
수화기 너머의 아버지는 잠깐 새에 짧은 한숨을 토해 내고서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꼭 집에 들러 선물을 사다 주마. 나는 간절히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그것은 이미 기도가 아니라 주술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미리 예감한 것처럼 깜찍하고 악마적인 힘으로 아버지를 유인했다.
아버지가 단 한번도 평범하고 진실한 가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기필코 스스로 고난의 운명을 그 대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암묵적인 계시일거라고 나는 믿었다. 애초에 내 답변을 기대하지 않은 듯 두 남자는 구두를 신은 채 이내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섰다. 마루 위로 네 개의 구두 발자욱이 어지럽게 찍혔다.
선명하게 찍힌 네 개의 발자국들은 얼핏 군화 발자욱처럼 크고 육중해 보였다. 아버지는 군화를 신는 사람들을 끔찍이 싫어했다. 두 남자의 짧은 스포츠 머리와 군화 모양의 발자욱은 군인들을 닮았다. 나는 그들이 아마도 정치하는 군인일거라고 생각했다. 정치하는 군인이란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나와 동생 앞에서 아버지가 군인이 정치를 하는 시절에 군인을 미워해서 감옥소에 들어간 거라고 수군거렸다. 군인을 싫어한 아버지는 군인들을 미워하는 글을 세상에 발표한 죄목으로 기나긴 도피 중이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명령 밖에 모르는 무지한 군인들이 나라를 망쳤다고 동생과 내게 말했다. 나는 불쑥 조바심이 일었다. 만일 아버지가 자신의 서재에 그토록 싫어하던 군인이 침입한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군인들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무언가를 찾고 싶어했다. 마침내 아버지의 서가로 들어선 검정자켓의 사내가 어지럽게 쌓여 있는 책들을 천정 꼭대기에서부터 한번에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책들이 천정 위쪽에서부터 천천히 갈라지며 무너지는 광경은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공포만큼 두려운 전율이었다.
만일 사내들에게 끌려간다면 아버지 역시 자신의 책들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죽고 말리라. 그게 아버지의 운명이 되고 말리라. 무서워, 동생이 내 손을 불끈 잡았다. 어이없게도 그 순간 나는 언젠가 아버지가 읽어주었던 책 속의 한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파괴하지 않으면 건설할 수 없나니.
나는 무너져 내리는 책 더미들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렇다. 나는 무너지는 책들 속에서 일상적이고 성실한 가장의 자리에 서본 일이 없는 아버지의 파멸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 때 아버지가 기척도 없이 거짓말처럼 성큼 성큼 대문을 들어섰다.
아버지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아버지의 오른 손에 들린 네모난 크레파스 상자 위에는 어지러울 만큼 선명한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성큼 성큼 다가와 말했다.
-바깥에서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동생 데리고 잘 있거라.
아버지의 눈빛 속에는 이상한 기운 하나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체념을 닮은 것인가 하면 어떤 희망을 품은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눈빛이었다. 두 명의 사내가 간단히 아버지를 포박했다. 나는 현기증이 나도록 아스라한 여덟 번째 생일의 봄 빛 속에서 내 곁을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봄볕이 어쩐지 무서운 일을 잉태하고 있다는 걸 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흰 복사꽃이 비릿한 향기를 내뿜으며 송이 째 스러지는 환영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다시는 건너가지 못할 정겹고 아스라한 동심의 세계가 되어 내 곁을 떠났다.
아버지가 떠나고 난 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아버지의 책들은 아버지가 평생을 묻어온 청춘의 찬란한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청춘의 상징이자 동시에 고난의 징표이기도 했다. 책 속에 탐닉하여 청춘을 바치는 일이란 사람을 얼마나 외롭게 하는 것인지 어머니는 잘 알고 있었다.
느그 아부지 글 쓰다 빚져가 망해 먹으면 일년들이로 이사를 댕기 쌓는디 가난한 세간살이에 책은 또 얼마나 징하게 많노. 한 트럭이 넘는 책을 실어가 날르라 카면 무겁고 싫다고 짐꾼들이 다들 도망을 가 뿌리는기라. 아무리 지켜세도 소용이 없어가 한번은 책을 길바닥에 부려놓고 안즉 집안에 들이지도 못했는데 날은 어두컴컴하니 어두워오고 일꾼들은 다 도망가 뿌리고 어쩌겠노. 느그 아부지야 워낙 집에 붙어 있는 양반도 아니고 내가 하나 하나씩 들어 나르다가 이러다 책 도둑맞음 어쩌노 싶은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어가 안즉 어린 너를 어둑어둑한 길가에 세워 두고 누구 나쁜 아저씨가 책 집어가는가 정신 똑바로 채리고 지키라고 했제. 그러다가 그만 짐 정리를 하느라고 깜빡 너를 길가에 세워둔 걸 잊어 묵은기라. 깜깜한 한밤중이 되어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보니께 어린 너가 안즉도 꼼짝없이 가로등 밑에 앉아서 쭈그리고 있는기라. 날도 어두운데 그 많은 책들을 지키고 섰느라고 어린기 한 데서 얼마나 추웠을꼬 싶어, 아나, 얼른 들어가자 했더니만 너가 꽁꽁 언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으며 한다는 말이 이대로 책들을 내버리고 가면 나쁜 아저씨들이 죄다 집어 가면 우짜노 이카는기라.....
그 날 이후 아버지는 감옥으로 들어갔고 어머니는 또 다시 오랜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젊은 아버지와 그의 어린 자식이 남루한 흑백사진 속에 갇혀 버린 오랜 비밀 이야기하나를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나를 아비를 팔아먹은 나쁜 자식이라고 욕할 것이다.
잊지 못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종종 아버지의 환영을 보았다. 그러나 찰라와 같이 사라지는 허망한 꿈속에서조차 아버지는 한결같이 뒷모습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어젯밤 불쑥 나를 찾아온 어머니는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우겼다.
-내가 인자 영영 그 인간하고는 몬 살겠다. 안즉도 마감일에 못 대어 쓴 원고 독촉은 사 방에 널려 있제 사무실 임대료조차 밀려가 다 쫓겨가다시피 감옥소에 들어간 마당에 그 새 어디에서 나 몰래 다 쓰러져 가는 사무실을 하나를 또 얻어 놓은거라. 주인도 없는 사무실이라고 들어가 보니 하수구가 막혀서 내가 한나절 걸려 다 뚫어 놓고 혼자서 책을 일일이 들어다 나르느라고 허리가 부러질 뻔 안 했나.
나는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살아있는 현실이었다. 아버지는 마음을 다잡아 착실히 원고에 매달리다가도 갑갑증이 일면 간단히 계약을 깨버리기 일쑤였다. 마치 그렇듯 태연히 사회적 관계들을 저버리는 일이 젊은 날 자신을 곤고하게 한 세상을 향한 유일한 항거의 길인 것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버지의 돌연한 절필선언은 종종 주위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런 아버지는 자신이 곧 감옥소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엉뚱하게 어머니 몰래 일을 준비했을 것이고 어머니가 또 다시 빚을 얻어 사무실 임대료를 충당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느그 아부지 구치소로 이감되기 전에 내가 서에 가가 한 분 보기는 했는데, 영락없이 한 밤중에 자다말고 끌려온 행색이라. 급한 대로 속옷하고 양말 몇 개 넣어 보내긴 했지만도 그기 참말로 별 소용이 닿겠나. 돌아서면서 늬 아부지 뒷모습을 보니까네 참말로 인자는 빼도 박도 못하게 늙어 버린기라.
오는 세월을 저 혼자 다 맞은 사람 마냥 멀대 같이 큰 키에 허옇게 내려앉은 흰머리를 하고서 등허리가 구부정허니 휘었는데 그 와중에도 눈매만큼은 안즉도 쨍쨍하등만. 아무케도 이분에는 상대를 잘 못 만난가 싶다. 상대가 여간 숭악헌 놈이 아니라는구나. 느그 아부지는 안즉 고료를 다 못 받았다고 주장하지만도 그 놈은 아부지가 돈 다 받아 묵고 나서 청탁한 원고를 안 해줬다고 고발해 부린거 아이가.
아무리 그래도 민사라 설마 끝까지야 갈까 싶었더니 또 다시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아나, 이 애야. 나는 다시 그 속을 딜여다 보긴 싫다. 내가 니 어릴 적에는 새끼들 데꼬 먹고 살라고 어짤 수없이 붙어댕깄지만은 머리 허얗게 되어가 안즉도 그 짓을 해야 된다 말가.
그래도 젊어 그 안에는 젊은 글쟁이들끼리 피가 더워 바른 말해가 감옥소 간거라 남들이야 옥바라지하는 여편네라고 날 우습게 대해도 내 자신은 떳떳했지만도 인자는 민사에 걸렸으니께 똑 잡범한가지로 다를기 없는기라. 늘그막에 낭패스러버서 그 일을 어찌 다 당한다 말고. 내는 몬 간다. 암만해도 이 분에는 금방 나오긴 틀렸지 싶다.
올 겨울은 거기서 나야 될지 싶은데, 서슬 퍼런 시절 때 비하믄 못 배기랴 싶지만도 찬바람 불면 가막소는 칼 추위니라. 니가 가가 솜 내복이나 좀 넣어드리고 오니라. 마누라가 안 딜여다봐도 자슥 얼굴이라도 보면 마음이 좀 안 풀리겠나...
어머니를 보내고 나서 나는 큰 거리를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걷고 있을 어머니가 떠올랐다. 문득 어머니에게 오래된 흑백 사진 속의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어머니가 건넜을 건널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신호등의 파란 불이 금방이라도 아슬아슬하게 꺼질 듯 점멸해 가고 있었다. 그 푸른빛을 놓치면 영영 끝이 날 것 같아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홀로 고단한 한 생애를 터벅터벅 걸어가 집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 길은 어머니 혼자서 걸어야 할 길처럼 고독해 보였다. 어쩌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생애 처음으로 시국사범이 아닌 잡범으로 걸려들었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시국사범에 자존심을 걸어왔다는 건 생경한 일이어서 나는 처음으로 어머니가 낯설게 느껴졌다.
대기실 스피커에서는 오 분 간격으로 연달아 수인들의 번호를 쏟아놓았다. 천백십사번. 나는 아버지의 수감 번호를 마음속에 되뇌었다. 그러나 끈질기게 달라붙는 더위처럼 기다림은 지루하고도 길었다. 나는 대기실 밖으로 나가 접견창구로 다가갔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죠? 창구 안의 직원은 거듭되는 업무와 더위로 지쳐 보였다.
그는 내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한 듯 이마를 찡그려 보였다. 얼- 마- 나- 더- 기- 다- 려- 야- 하- 죠? 나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천천히 되풀이해 물었다. 그제서야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번호가 어떻게 되시죠? 천백십사번이요. 천백십사번, 조금 더 기다리세요. 명단을 힐끔 바라보고 나서 직원이 짧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천백십사번, 천백십사번. 그 순간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천백십사번이라는 네개의 낯선 기호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대기소로 발걸음을 돌리려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서 창구로 되돌아가 물었다. 저, 천백십사번 영치금을 넣고 싶습니다만. 천백십사번이요? 창구 안의 직원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천백십사번. 영치금이 꽉 찼어요. 더는 초과할 수 없습니다. 대신 음식물로 넣으세요.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아버지에게 영치금을 넣을만한 다른 누군가의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이 웬일인지 껄끄럽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지인이나 출판 관계자들이라면 아버지를 위해 미리 영치금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의 구속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게다가 영치금을 넣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면 아마도 어머니가 내게 먼저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가방 안에 든 솜 내의를 만져보았다.
그것은 얌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더위에 솜 내의라니. 웬 일인지 그 물건이 새삼 우스꽝스러운 이물질처럼 여겨져서 아버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현실감 있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대기실로 되돌아와 막 자리에 앉았을 때 발 밑으로 작은 동전 하나가 굴러 왔다. 이제 겨우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어린 아이 하나가 동전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 선풍기 아래에서 땀을 닦고 있었다.
젊은 부인은 아기를 향해 얼른 되돌아오라고 연신 손짓을 하고 있었지만 아이는 동그랗게 굴러가는 동전에 한 눈이 팔려서 정반대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동전을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펼쳐진 아이의 작은 손바닥 안이 땀에 절어 따뜻했다. 손바닥 안에 동전을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이가 까르르 미소지으며 웃었다. 아이의 환한 미소가 엷은 희망처럼 반짝이자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도 작은 미소가 번졌다.
아이의 미소 속에는 애처로운 연민이 숨어 있다. 어린 것, 가여운 것, 반짝이는 것에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아이의 여린 미소가 무감동한 사람들의 표정을 일순간 환히 밝혔다가 사라졌다. 땀에 젖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아이의 얼굴을 마주보며 함께 미소짓던 젊은 여인도 다시금 시름에 찬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미소가 걷힌 여인의 얼굴에는 텅 빈 허공만 남아있다. 아마도 아이의 젊은 아빠가 감옥에 갇힌 것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인의 얼굴은 앳된 젊음을 감추고 있다. 기껏해야 스물 대 여섯살 쯤? 감옥에 들어간 남편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다. 나는 고난받는 여인의 삽화에 익숙해져 있다. 기억의 풍경 속에서 여인들은 다만 남자를 기다릴 뿐이다. 어머니는 평생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았다.
4.
일천 구백번 지금 즉시 3번 면회소로 오십시오. 스피커에서 호명을 하자 두 명의 남녀가 벌떡 일어섰다. 색이 바랜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커트머리 여자아이와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남자 아이. 그 순간 여자아이가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뒤지더니 민첩하게 네모난 물건을 꺼내들었다. 가방 속에서 돌돌 말린 채로 나온 물건은 뜻밖에도 작은 플랑카드였다.
여자아이가 플랑카드를 펼쳐드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플랑카드에 적힌 선명한 고딕체 글씨로 쏠린다. <오빠, 사랑해요> 플랑카드에 적힌 글귀는 브로마이드에 나오는 잘 생긴 스타의 콘서트 장소에서나 어울릴 듯한 대사이다. 사람들의 얼굴 위로 잠깐 어이없는 듯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간다. 감옥소에 갇힌 여자애의 오빠는 진짜 오빠일까, 혹은 애인일까, 그렇다면 함께 동행한 노랑머리 남자애는? 나는 부질없는 상념으로 젊은 남녀를 바라본다. 오빠,>
그들의 자유는 유치하지만 싱싱해 보인다. 어쩌면 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면회를 기다리며 플랑카드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를 떠난 후 수는 내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냈다. 나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내려 갔다.
너를 지나간 과거라고 믿기 시작했다. 너를 지워진 과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너를 익명의 이름에게 빼앗기고 홀로 선 나는 자유롭다.
그 문구들은 이제 수가 내 안에서 또 하나의 과거로 지워짐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수의 말처럼 내 마음을 빼앗은 것은 익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수를 떠나온 것처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여자애가 플랑카드를 들고 발랄한 동작으로 대기실을 빠져나가자 남자애가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른다. 그들이 마치 콘써트를 관람하러 가는 사람들처럼 의기양양하게 사라져버리고 나자 대기실에는 다시 그들이 남기고 간 적막이 우울하게 남았다. 그러한 모든 풍경들은 두 남녀가 문을 열자마자 잠깐 사이에 작열하는 탐스러운 태양 빛 속에서 환히 빛났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문 밖의 눈부신 태양 저 편에서 여자아이는 불과 오분여만에 스쳐 지나갈 짧은 재회에 감격하며 그간의 애틋한 마음을 고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노쇠해져서 등이 구부러져 푸른 수의에 가려진 늙은 아버지를 나는 무엇으로 마주할 것인가.
갑자기 참을 수 없이 요의가 다급해졌으므로 나는 대기실 뒤켠의 화장실로 갔다. 뒷 켠의 화장실 건물은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한 낮인데도 칙칙하고 어두컴컴하다. 용변을 마치고 나서 수도꼭지를 비틀자 수도물이 짤짤 소리를 내며 빈약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은 타일을 깔았지만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면에는 실내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거울하나가 어색하게 붙어 있다. 나는 벽면에 붙어있는 거울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붙잡으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이대로 멀리 도망을 가버려라. 그냥 이대로...? 거울 속의 또 다른 내가 놀란 표정이 되어 물었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서려 할 때 문득 나를 쳐다보는 시선 하나가 느껴졌다. 문득 바라 본 거울 속으로 놀랄 만큼 아버지의 눈빛을 빼 닮은 눈길 하나가 쏘는 듯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대로 문을 닫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무더위 탓에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대기실은 여전히 부산해 보였다. 찜통 같은 대기실 안으로 곧바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대기실을 조금 벗어나 정원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뜨겁게 쏟아지는 태양 빛을 피해 산책로로 들어서자 도로 오른 편으로 몇 개의 나무그루가 만들어낸 빈약한 그늘이 눈에 띄었다. 뜨거운 더위였지만 대기실의 칙칙한 어둠보다는 그런 대로 견딜만한 장소이다.
나는 어두컴컴한 곳을 유난히 싫어했다. 어머니가 있는 풍경은 늘상 칙칙한 어둠 속이었다. 창이 너무 작아서 햇살이 겨우 들어오는 작은 실내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재봉틀에 매달려 있었다. 창 밖으로 바람소리가 윙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나는 벤치에 비스듬히 앉았다. 날이 웬만큼 추워야제. 바람이 몹시 분다. 어머니가 추위로 몸을 부스스 떨며 말했다.
- 일전에 느그 아부지가 내 손에 죽을 뻔했다 안 하나.
어머니가 손으로 매만지던 옷감의 실을 탈탈 털어 내며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느그 아부지가 장충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했을 때 였는갑다, 무거운 전집을 들고서 나 혼자서 낑낑대는데 느그아부지는 그 와중에도 태연히 의자에 앉아 선비 마냥 책에 눈을 박고 있는 기 아이가. 그때 내 속에서 고마 확 불길이 일더마. 그래가 손안에 들고 있던 육중한 전집 책 한 권을 가슴팍에 확 던져버렸더니 그대로 고꾸라지는기라. 그런걸 내가 다시 달려들어 멱살을 붙잡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가슴팍을 요래 쥐어뜯고 악을 썼다 아이가. 니가 뭔데 나를 이리 만드노. 대체 니가 뭔데 나를 이리 고단하게 만드노 말이다. 그래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네 느그 아부지 얼굴이 반쯤 넋이 나가 있는기라. 그라고 보니께 인자는 참말로 늙었데. 내 손아귀에 잡혀 이리 저리 따라 흔들리는데 참말로 벨 수 없데. 그때 내가 제정신 안돌아왔으믄 단단히 일 낼 뻔 했제.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어머니의 눈길이 이상하게 번질거렸다. 사백십구번 면회소로 오십시오. 사백십구번. 다급한 마이크 소리가 평화로운 잔디밭 벤치 위로 울렸다. 나는 빠르게 벤치 위에서 일어섰다. 어쩌면 내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번호가 불려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음이 급했다. 면회소 앞에서 막 면회를 마친 듯 흰 모자를 쓴 여인이 그림자처럼 재빠르게 앞쪽을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침착해야 한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가방 속의 솜 내의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여전히 안전하고 따뜻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곧바로 대기실 옆 창구로 다가갔다. 접견번호를 재차 확인해서 안내원에게 불러주자 안내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 천백십사번이라구요?
머리를 바짝 치켜 깍은 남자직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 이상하군요. 바로 조금 전에 다른 분이 면회를 다녀가셨는데요.
-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아득해져서 창구 직원에게 되물었다.
-이거 안되었군요. 죄송하지만 오늘 면회는 곤란하겠는데요. 뭔가 행정상의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아, 여기 있군요. 김 아네스라고 조금전에 흰 모자를 쓴 여자분인데 혹시 모 르는 분이세요? 오늘 그 분이 다녀가셨어요. 본의 아니게 이중접수가 된 건 유감입니다 만 규칙상 하루에 두 번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죠?
김아네스라..., 나는 마음속으로 낯선 여인의 이름을 상기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머리 속에서 그것은 생경한 타인의 기호처럼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자, 보세요. 여기 면회일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창구의 직원이 확인하듯 내게 면회일지를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나는 면회일지에 적힌 여인의 간단한 프로필을 훑듯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란에는 다만 지인이라고 간략히 적혀있을 뿐이었다. 나는 흰 모자를 쓴 여인의 잔영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미명의 여인은 몇 개의 단편적인 실루엣으로 드문드문 떠오를 뿐이었다. 여인은 허공에 뜬 가상의 존재처럼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나는 아버지와 김아네스라는 여인의 상관관계를 헤아려보려고 애썼다. 만일 그녀가 영치금을 차입한 장본인이라면 아마도 아버지와는 가까운 지인 사이일 것이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아버지의 현재 속에 관여하고 있는 인물이 누구이든 어쩌면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건 다만 아버지가 이미 오래 전에 증발해 버려서 없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어떤 증거일 뿐일테니.
나는 대기실 창구 앞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망연히 서 있다가 이내 허둥거리며 오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익명의 누군가가 나보다 먼저 아버지를 대면하였으며 아버지는 내게 여전히 부재중이라는 사실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처럼 분명해졌다. 나는 가방 속을 더듬어 어머니가 전해준 솜 내의를 만져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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