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전주국제영화제가 뜻깊은 기획을 시작한다. 필름메이커스 언제나 아마 발견과 생성을 축복하고자 했던 전주국제영화제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대개 국제영화제들에 초대된 감독들의 자리는 '영웅적인 저자(author)'의 자리이다. 요컨대 그것은 탁월한 작품을 창조한 '천재'이거나 혹은 그에 미치진 않더라도 그 개념의 자장 내부에서 고유한 인격을 내세운다.
영화는 언제나 집단적인 협업의 노동과 수다한 기계적 공정을 거치는 생산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예술의 목록에 자신을 등재하기위해 위험한 도박을 감행하였다. 영화는 예술이기 위해 예술가라는 주체를 소망하였고 그것은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의 위대한 저자로서의 작가는 영화의 역사가 영화의 물질적 현실을 제거하면서 얻어낸 전과였다.
그런데 작가라는 위치에서 영화를 둘러싼 물음을 묻는 것은 사실 바보스런 짓이다. 그 자리는 이미 설정 자체로부터, 영화를 둘러싼 물음을 진부한 문답에 가두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능한 주체처럼, 작가를 영웅의 만신전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의 개별적인 자질, 그가 주고받은 영향의 흔적, 그의 자기 동일성을 구성하는 어떤 일관된 핵심을 찾아 대화를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독과의 대화가 이뤄지는 자리가 유인하는 폐쇄된 대화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마련한 필름메이커스포럼은 아마 그런 대화의 공간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가 필름메이커스포럼에서 초대한 감독은 닝잉과 플로랑스 페레이라 바르보사이다. 닝잉은 지난 해 전주국제영화제가 <희망의 철로> 라는 다큐멘터리 작품을 통해 소개했던 감독이다. 또한 연전 <아이 러브 베이징> 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 관객을 만나기도 했다. 반면 생소한 이름의 감독인 바르보사는 그다지 과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많이 낯선 감독이다. 아이> 희망의>
그러나 그녀의 필모그라피와 연보를 통해 짐작컨대 전주에서 그녀와의 해후는 뜻밖의 놀라운 기쁨을 안겨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두 감독과 어떤 대화를 나눌지 미리 기약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쩌면 두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관념의 표현으로 볼 수밖에 없는 관객의 무의식을 비웃으며, 상상할 수 없는 위치에서 발언할지도 모른다.
대화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억으로 내면화되지 못한 타자의 의외성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만이 대화를 진부한 나 안의 그/그녀로 전락되지 않은 그/그녀의 낯섦에 눈뜨게 만들어준다. 대화는 그럴 때만 하나의 '사건'이 되어 서로를 변신시키도록 한다.
전주국제영화제의 필름메이커스포럼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바로 이런 사건의 도착이다. 그것이 도착함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영화의 만남에서 기억되었던 영화의 정체성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과 쾌락을 변경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럼 이번 필름메이커스포럼에서 우리가 걸 수 있는 기대는 무엇일까. 두 감독은 서로 호환될 수 있는 영화의 세계에서 동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북경 삼부작'으로 알려진 닝잉의 극영화들과 또 그녀가 참여하고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품들은 1990년대 이후 중국 사회의 변화가 빚어낸 새로운 사회적 주체성을 주시한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국민이라는 균질적인 주체의 공간 바깥에서 자기(self)의 삶을 시작하게 된 새로운 주체이다.
그런 점에서 닝잉의 작품은 5세대와 6세대의 감독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5세대의 감독들은 아버지-마오쩌뚱-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삶의 선택과 자유를 추진하려 했고, 그래서 그들을 지배했던 에토스는 아버지의 망각이자 거부였을 것이다. 반면 6세대는 6세대는 더 이상 작별의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는다. 마치 역사의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듯 그들은 지금 여기의 북경과 상하이, 도시와 빈곤, 록큰롤과 자전거, 텔레비전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닝잉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섭렵한다. 그녀는 자신의 시대를 이야기화하는 자기 세대 특유의 서사적 관례와 거리를 둔 채 그것과 동일시하기를 극구 꺼린다.
이야기-쓰기가 역사에 대한 공통의 사회적 의식과 주체를 만드는 작업이라면 바르보사 역시 이로부터 불편한 거리를 유지함에 있어 다르지 않다. 바르보사의 작품의 이력이 알려주듯 그녀는 이야기-쓰기에 금욕적인 태도를 보인다. 영화로부터 자기 시대의 진실을 추궁하려고 하는 한 영화는 대개 역설적으로 빈곤에 빠져든다. 영화의 화면은 사회의 지배적인 도상을 반복하고, 이미지는 미디어스케이프 안에서 머뭇거리며, 언어는 유행가 가사처럼 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바르보사는 그런 영화의 빈곤과 대적하며 영화를 풍요롭게 바꾸어낸다.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가 갖는 가장 탁월한 능력, 즉 표상에 포박되지 않은 세계를 드러내는 능력이다. 그녀의 영화가 분명히 스토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야기에 크게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고, 그 이야기들은 질식하리 만치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의 범람 속에서 정작 세계로부터 멀어진다. 이야기는 세계와 대면하는 '다른' 길을 지워버렸고, 우리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자신이 걸어온 삶의 길의 흔적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다. 바르보사는 그 길을 다시 찾도록 속삭여줄지 모른다.
감독과의 대화는 거북한 만남이다. 우리는 그가 제출한 수수께끼를 풀어야하는 난처한 처지에 몰린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는 정답을 찾아냄으로써 풀려버리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감독은 세계를 제시하지 않고 세계를 수수께끼로 만드는 수고를 마다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세계를 괄호치고 감독은 그 세계를 읽는 다른 이미지를 제출한다. 그리고 대화는 시작된다. 필름메이커스포럼에서 우리는 자신의 언어를 조심스럽게 더듬거리는 감독과 만날 것이고, 감독이 자신의 언어를 향해 느끼는 불안한 고독을 덜어줄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감독이 바라본 세계와 흔쾌히 화해할 수 있거나 아니면 그와 불편한 질의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필름메이커스포럼은 그런 자리여야 옳다. 영화가 더 이상 대화를 포기했을 때 영화는 깊은 잠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필름메이커스포럼이 영화의 잠을 깨우는 자리이길 기대해마지 않는다.
/서동진(연세대 성공회대 문화이론 강의/서울 퀴어아카이브 프로그래머/한국 시네마테크협의회 이사)
-위 글은 전북일보에서 제작한 '2003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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