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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JIFF] 이란 영화의 물결

 

 

내가 이란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96년이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란 긴 제목의 영화는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조용히 개봉했고, 당시 난 순전히 영화프로그램 작가라는 의무감에 그 영화를 보게되었다.

 

친구의 숙제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영화 내내 뛰어다니는 아마드. 내 생애 최초의 이란 영화는 그렇게 순진하고 맑은 소년의 눈망울처럼 다가왔다. 흙바람이는 황토빛 사막, 지그재그 모양으로 난 언덕길, 그 위를 달리던 순박하고 착한 아이들. 영화는 그렇게 내게 이란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2년 뒤 나는 같은 극장에서 또 한편의 이란 영화를 만났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가베> . 이름조차 외우기조차 힘든 낯선 감독의 영화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이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들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총천연색의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유목민들, 푸른 초원과 졸졸 흐르는 개울물. 사막과 지진의 나라 이란의 이미지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보여주는 이란 북부의 풍경과 마흐말바프 감독이 보여준 남부의 풍경이 확연하게 다른 것처럼 이란 영화 역시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 초 나는 이란 영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테헤란을 찾았다. 그곳에서 마흐말바프 감독을 비롯해 <천국의 아이들> 을 만든 마지드 마지디, <하얀 풍선> <써클> 을 만든 자파르 파나히 등 이란의 대표적인 감독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때 감독들은 하나같이 이란 영화가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보름간의 취재 일정동안 나는 그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내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천국의 아이들> 같은 영화 때문에 이란 영화하면 으레 가난한 아이가 나오는 영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밋밋한 영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해외 영화제용 영화들이다. 자국안에서 인기를 끄는 상업영화들은 훨씬 액티브하고 빠른 속도감을 가지고 있다.

 

이란 영화는 기본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정부에서 이란 영화 산업을 주도하고 있으며 모든 영화인들은 영화를 만들기 전에 시나리오 검열을 받는다. 검열을 피해가려면 마흐말바프 가족처럼 집을 팔고 차를 팔아가며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엄격한 검열제도는 감독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많은 제약을 준다. 

 

일례로 이란 영화에서는 여배우가 머리에 루싸리(이란 여성들이 머리에 쓰는 스카프의 총칭)를 쓰지 않고 등장할 수 없다. 남편과 가족이 아닌 외간 남성에게 머리카락을 보이면 안 된다는 코란의 규율 때문이다.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 정부를 비판해서도 안되고,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이 나와서도 안 된다. 이런 규율을 어겼을 때 영화는 상영 금지 조치를 받게 된다. 상영 금지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데,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던 자파르 파나히의 <써클> 은 아직까지 이란 내에서 상영이 금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반드시 나쁘게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감독들은 검열을 피해나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더 많이 고민하게 되고, 그 결과 철학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영화들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낙천적이고 여유있는 이란 사람들의 성품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이란 영화에 대한 또 하나의 선입견은 여성감독에 대한 부분이다.

 

여성에 대해 많은 제약이 가해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여성 감독이 전무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보다 여성 감독들이 훨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연령대도 다양하다. 올해 49살로 이란 영화의 어머니라 불리며 존경받는 락샨 바니 에테마드, 혁명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타흐미네 밀라니, 18세의 나이로 깐느 영화제 최연소 수상자가 된 사미라 마흐말바프 등은 모두 이란을 대표하는 감독이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여성 감독들이다.

 

또, 이란은 애니메이션의 강국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세계 유일의 석판화 애니메이션도 이란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또 단편 영화 감독들의 활동도 왕성해서 일년에 무려 400편 이상의 단편 영화가 만들어지는 나라이기도 하다. 여기에 최근 이란 영화는 소수민족, 여성의 문제 등 소재면에서도 더욱 다양한 이야기들로 넓어지고 있다.

 

이번에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도 다섯 편의 이란 영화가 소개된다. 아시아 독립 영화 포럼에출품된 <입학시험> 은 나세르 르파이라는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은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지난해 테헤란 대학 신입생의 65%가 여성이었다고 하는데, 여성들의 활약이 커지고 있는 이란의 현실과 그 속에서 겪는 여성들의 어려움을 잘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두 번째 작품은 시네마 스케이프에서 소개되는 <황폐한 정거장> 이다. 이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각본을 쓴 영화 <여행> 으로 데뷔한 알리레자 라이잔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이번 영화 <황폐한 정거장> 역시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아이디어를 기초로 했다고 하는데, 내용면에서 전작인 <여행> 과도 연결성을 가진 작품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도 볼 수 있다. 이혼한 여성의 삶을 다룬 <텐> 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이혼 문제와 여성들이 겪는 현실의 어려움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네 번째 영화는 아미르 나데리 감독의 <마라톤> 이다.

 

아미르 나데리 감독은 7,80년대 왕성하게 활동하며 14편이상의 영화를 만든 중견 감독으로,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로 국제무대에 잘 알려진 감독이다.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하면서 뉴욕 3부작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번 영화 <마라톤> 역시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란 감독이 만든 미국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가 모아진다.

 

마지막 작품은 디지털 삼인삼색에 출품되는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다프> 다. 다프는 이란의 전통악기의 이름인데 우리나라의 북과 비슷한 악기다. 하지만 북채가 아니라 손가락의 힘으로 연주를 하는데 상당히 남성적이고 힘있다.

 

사실 나는 그 매력적인 다프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만으로 이번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가장 기다리고 있다. 올해 전주에서 나는 이란 취재 여행의 추억을 되새기며 이 영화들을 보려고 한다. 영화를 통해 이란이라는 낯선 나라를 탐험하는 즐거운 경험을 보다 많은 관객들이 함께 누리길 기대해본다.

 

/석은정(1991년부터 KBS, SBS 등에서 교양프로그램 작가로 활동 / EBS <시네마 천국> 으로 영화 프로그램 시작 / 케이블 TV 무비 플러스 <영화 노트> 작가 / 현재 EBS <시네마 천국> 작가)

-위 글은 전북일보에서 제작한 '2003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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