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택일 강요하는 사회에 일침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숱한 작품들을 다 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신중하게 작품을 '찍어'시간표를 만들게 된다. 이 순간이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즐거운 시간인지는 영화 마니아라면 다 알 것이다.
같은 시간대에 보고싶은 영화가 너무 많이 몰려 있어 할 수 없이 한 작품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포기해야 할때의 아픔이란! 그렇게 신중하게 고른 작품이 별로 일 때 엄습하는 실망감과 분노는 또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나, 한 편의 '보석'같은 작품과 맞닥뜨릴 때, 그 모든 실망감과 분노는 순식간에 모두 보상받고 만다. 그래서 영화제는 언제든지 즐겁고 또 기다려지는 것이다.
'경계도시'(홍형숙 감독)는 바로 그런'보석'에 해당하는 작품이었다.
언론을 통해 익히 알려진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에 관한 다큐멘터리라는 것외에 , 이 작품에 비해 나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내가 이 작품을'찍은'이유는, 송두율 교수보다는 오히려 비슷한 처지에서 결국 독일 땅에서 타계하고만 윤이상 선생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바가 더 컸다.
그리고 한 회 밖에 상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놓칠 수 없다'는 절박감을 부추겼다. 무언가를 외치고 있는듯한 석상의 클로즈업에서 시작되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나 뜻밖에도 '남'도'북'도 아닌 '경계'에 선 한 인간의 단호하면서도 쓸쓸한 형상을 참으로 감동적으로 담아낸 역작이었다.
푸른 덩굴식물이 늘어진 넓은 창을 마주한 단아한 그의 서재, 곧잘 눈시울을 붉히는 그의 아내, 야당의 반대로 끝내 다시 한 번 좌절되는 한국행, 그것을 알리는 서울로부터의 전화를 담담하게 받는 송두율 교수의 뒷모습, 베를린의 밤거리에 내린 눈을 휩쓸고 지나가는 차가운 바람, 유학생들과 서로 세배를 나누고 차와 떡을 함께 하는 새해 아침, 비록 몸은 가지 못하지만 영상강연을 통해 한극의 젊은이들을 만나고, 이 젊은이들이 서울에서 인편으로 보내준 강연공지 플래카드를 감격하며 받아드는 그, 큰 스승이자 망명생활의 대선배격인 윤이상 선생 묘소 앞에 바친 흰 꽃다발을 쓰다듬는 송두율 교수의 손길, 그리고 돌아서는 그들 부부 등뒤로 뿌리는 가랑비…
정권이 수 차례 바뀌었으나 삼십여 년 동안 그로 하여금 고국망을 밟지 못하게 하는 논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는 다큐멘터리 앞뒤에 짤막하게 덧붙인 국정원 사람들과 나눈 대화 장면으로 간단히 , 그리고 아주 효과적으로 처리되었다. 이런 데서 감독의 만만찮은 솜씨가 물씬 느껴진다. 이 작품이 한심한 한국 정치인들이나 아직도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건조하고 목소리 높은 성토의 장이 아니라 한결 차원 높은 인간에 대한 드라마로 승화된 데에는 감독의 이런 빼어난 솜씨가 단단히 한 몫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왜 '이것'아니면'저것',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하는 국가나 사회가 건전하지 못한지, 단호하고 결연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분노와 눈물을 삼키는 한 인간의 초상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저절로 깨닫게 된다.
나는 영화제 측에 긴급제안을 하고 싶다. 이런 작품을 한 회만 상영하고 그만두는 것은 '보석'을 찾아 헤매는 숱한 마니아들에게는 일종의 폭거에 다름없으니, 특별상영을 마련하라고.
/김영혜(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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