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렇게 색바랜 종이 위에 정성을 더해 써낸 이름들. 세월의 더께는 너덜너덜해진 종이책에 고스란히 얹혀 있지만 이름 석자를 읽어내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4일부터 11일까지 전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종이로 찾아가는 나의 뿌리-족보 특별전'은 내가 온 근원을 찾아보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어린이날인 지난 5일 이 전시회를 찾았던 관람객들은 조상들을 더듬어 내 뿌리를 추적해보는 매우흥미롭고 소중한 체험을 반가워했다.
"우연히 들렀던 길이었는데 아이들이 매우 흥미로워하는 것을 보고 새삼 '가족'과 '인연'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김명철씨(42)는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를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매우 곤혹스럽고 부끄러웠다. 나부터도 내 조상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족보는 같은 씨족의 세계를 수록하여 한 종족의 혈연 관계를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 '우리' 보다 '개인'이 앞서는 사회가 된 지금, 혈통의 의미를 가리는 일은 자칫 무의미하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나의 가계를 거슬러 혈통의 줄기를 찾아가는 일은 궁극적으로 '나'의 뿌리에 이르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종이문화축제가 기획한 이 전시는 족보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다양한 족보들을 통해 당시의 정치 사회상, 역사의 이면을 함께 읽을 수 있게 한다.
시대별로는 조선초기부터 족보가 전성을 이루었던 조선 후기까지, 내용으로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씨족 구성원 전체를 기록한 족보 뿐 아니라 가승(家乘, 자신의 직계 선조들을 기록한 것)이나 팔고조도(八高祖圖, 아버지쪽 만이 아니라 어머니쪽도 같이 밝힌 것)까지 망라됐다.
눈길을 끄는 희귀본이나 그 안의 주목할만한 내용들도 적지 않다.
팔고조는 하필 왜 그 이름이 붙여졌을까. 서양의 족보 처럼 나를 중심으로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의 가계도를 같이 밝히며 고조대까지 올라가보면 고조 할아버지가 모두 여덟분이었기 때문. 10대조까지 찾아가면 '나'의 조상은 1천24명이나 된다.
족보가 남자들 것이라는 인식이 얼마나 편견이었는가를 알려주는 자료들도 많이 있다. 조선초에는 아들 중심으로가 아니라 딸의 자손도 똑같이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순서도 아들 딸 가리지 않고 출생 순서대로 등재했다. 이 때만해도 꼭 아들로 대를 잇겠다는 의식이 조선후기처럼 강하지 않았고 아들이 없으면 딸이 제사를 모셨던 외손봉사(外孫奉祀)의 사회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양반들만 족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족보는 '필암서원의 노비 가계도' . 노비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만들었던 것으로 평가되지만 한 노비의 가계도가 상세하게 기록된 만큼 사료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가장 화려한 족보는 역시 왕실족보. 국가의 족보로 인식되어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사고'에 보관되었던 이 족보는 장정부터가 특별해 비단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지금처럼 예전에도 군역면제를 둘러싼 갈등은 심화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군역을 면제 받는 조건은 '혈통'. 양반후손인지 아닌지에 따라 면제가 결정되었다. 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된 서식 중의 하나인 '유서필지'의 '탈역소지( 役所志)는 양반 후손임엥도 군역면제를 받지 못한 시골의 양반이 그 억울함을 탄원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족보'는 가장 중요한 증거자료가 되었다.
이밖에도 문과급제를 당색으로 기록한 문보(文譜), 부녀자들이 볼 수 있도록 직계선조와 팔고조도, 문부무과 급제자들과 음관들의 직계선조를 밝혀놓은 '삼반 팔세보' 등 특이한 족보들도 눈길을 끈다.
족보도 일제의 아픈 우리 역사를 비켜갈 수 없다. 창씨개명을 했다가 다시 고친 종이위의 상처. 다시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흔적이다.
이 전시를 기획한 예원대 이동희교수는 "족보는 단순히 한 가계의 혈통을 밝히는 기록으로서 뿐 아니라 우리 역사와 정치 사회 문화사적인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사료다. 이지역이 기록문화의 뿌리가 깊지만 정작 족보를 전문적으로 수집 연구하는 단체나 기관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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