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자(農者)가 천하지 대본이던 시절, 그러니까 농업이 국가의 근간이었던 몇 십 년 전만 해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별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아니 구별할 필요조차 없었다. 한 동네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네 집에 논이 몇 마지기고 숟가락이 몇 개인지 손바닥처럼 환했으니 서로 숨길 것도 없었다. 요즘같이 공직자 재산등록도 공개도 필요 없는 깨끗하고 투명한 시절이었다 .
그러다 보니 이웃에 어려운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있는 사람들은 이웃의 처지를 외면할 수가 없었고 외면하지도 않았다. 요즘 백만장자쯤에 해당되는 '만석지기'들은 보릿고개와 같이 먹고살기 힘든 시기가 닥치면 곳간을 풀어 마을을 구제하곤 했다.
나는 이것을 만석지기의 윤리, 한국 부자들의 윤리,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농사짓는 일이 천하지 대본에서 후 순위로 밀려나고 산업의 중심이 2차 제조업, 3차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인구의 도시집중화로 거대도시가 건설된 결과 우리 이웃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알 필요도, 알 수도 없는 '마음 편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옛날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한 마을에서 어울려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부자들은 폐쇄된 호화 아파트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아래 달동네에서 끼리끼리 어울려 살아간다.
이 얼마나 편리(?)한가. 도시의 한 쪽에서 들려오는 어려운 이웃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이제 우리들은 양심의 가책이나 윤리의식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생계형 일가족 자살 사건이 꼬리를 물고 있다.
전북에서 얼마 전 생활고를 비관한 일가족 4명이 승용차에서 음독 자살한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꽃 피워보지도 못한채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다섯, 여섯 살짜리 두 딸의 명목을 빌고 싶다. 지난 7월 18일 '죽기 싫다'며 매달리는 어린 세 딸과 함께 30대 주부가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한 사건이 채 잊혀지기도 전이다.
얼마전 전 세계가 괴질 사스 공포로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범정부 대책을 세운다 뭐다 해서 난리 법석이 났었다. 그런데 그때 사스로 전 세계에서 몇 명이 죽었는가. '고작'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지만 그 당시 전 세계에서 희생된 사람은 고작 수 백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지난해 하루평균 36명이 자살했다. 이중 상당수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왜 이 나라가 발칵 뒤집히지 않는가.
상황이 이쯤 되었으면 일차적으로는, 거둬들인 세금으로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나라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헌법 제34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그 책임을 명시해 놓고 있다. 정부는 하루 빨리 사회복지 시스템을 보완해 적어도 가난 때문에 자살하는 불행한 사회구조를 차단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면피'가 되는 것인가? 우리 모두는 이쯤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윤리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의식주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쨌거나 이 사회의 수혜자일 것이다.
어려운 이웃의 하소연을 외면한 채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겸허하게 되돌아볼 일이다. 엊그제 자살한 정몽헌 현대아산회장도 이것저것 정리하면 남는 것은 겨우 집 한 채라고 한다. 함께 나누는 문화, 베푸는 문화를 만들어 보자.
/이용호(국무총리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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