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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 땅만 잘 파도 큰 깨우침으로 가는 통로가 있다

 

아래쪽 위쪽 모두 합해야 7백평 남짓. 올해는 이 좁은 밭뙈기에 서른여덟가지나 먹을거리를 섞어 농사를 지었다. 배춧잎은 벌레 먹은 자리가 숭숭 하고, 뿌리채소들은 잔털이 수북하다. 가뜩이나 좁은 땅에 이것저것 섞어 지었으니 수확이라고 해보았자 몇 집 돌려먹기에도 빠듯하다. 그런데도 밭주인은 큰소리를 친다.

 

"이제 농사일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지은 먹을거리 나눌 자격이 없다. 풀이라도 뽑고, 하다못해 농삿일할 때 노래라도 부른 사람에게만 나누어주겠다."

 

이쯤 되면 그의 당당함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손에 잡혀 뽑힌 잡초가 안쓰러워 땅 한쪽에 다시 심어주는 사람, 어린 잡초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 사람, 인간이 정해놓은 먹을거리의 기준에 의해 뽑혀지는 잡초 운명에 애잔함을 갖고 있는 사람. 농사꾼 전희식씨(45)가 그이다.

 

농사꾼이 된지 8년째, 완주군 소양면 상망표 마을에 흙집 지어 살고 있는 전희식씨가 귀농일기 '아궁이 불에 감자를 구워먹다'(역사넷)를 펴냈다. 2000년 5월, 두아이 새날이 새들이와 함께 쓰기 시작한 일기 모음이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사회 변혁 운동가로 도시 한복판에서 보냈던 그가 '남아있는 평생 땅만 잘 파도 큰 깨우침으로 가는 통로가 있다'고 믿게된 농사꾼으로 정착하기까지의 8년 세월은 그저 고단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자연과 땅으로부터 소중한 이치를 배우면서 살아온 나날들은 무욕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인가를 일깨운다.

 

아이들 이야기와 농사짓는 이야기, 그리고 마음자리를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자기 성찰과 시사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각각의 주제를 가진 틀로 묶여있지만 궁극적으로 맞닿는 지점은 자연과 땅의 이치다.

 

“농사지으면서 깨달은 소중한 느낌을 나누고 싶었다”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방적인 교훈이나 가르침이 아니다. 새벽에 밭에 나가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이슬에 젖고 땀에 젖는 창조적 노동의 기쁨으로 체득해 전해주는 생생한 이야기는 쌍방으로 소통되는 감동적인 대화다.

 

그에게 귀농은 농업으로 직업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땅과 자연에 의지해 그 일부가 되는, 이를테면 삶의 근본적인 틀을 바꾸는 변혁의 과정이다. 자연의 일부가 되는 일은 철저한 자기 의식의 변화로서만 가능하다. 밭에 제초제 한번 뿌리지 않고 비료 대신 자연스럽게 모아진 퇴비로 땅심을 살리고, 농작물에 비닐을 씌우지 않고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여 스스로 생명을 지켜가게 하는 그의 일상은 치열하다.

 

‘올해는 위험한 시도를 했었다. 고춧대를 묶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붙들어 묶어 가면서까지 고추를 많이 열리게 한다는 게 왠지 자연스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풀을 매면서 고추가 자기 무게를 못 이겨 기울어지거나 하면 다시 흙을 끌어올려 고춧대가 지탱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효소 만들고 고추 말리고 중에서’

 

‘농약을 뿌리고 비료를 들이부어서 허우대만 멀쑥하고 체력은 곯아빠진 요즘 애들처럼 겉보기 좋은 농산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더이상 농부가 아니다’고 단언하는 그를 노동운동가 박노해는 ‘노동자일 때나 농사꾼일 때나 늘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데 더 열심인 사람이다’고 말한다.

 

짧은 입산수도생활과 ‘야마기시공동체’를 거친 그는 명상적 사회운동을 추구하는 실천가. 본업인 농사짓는 일 외에도 대안적 삶을 위해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사회변혁에의 희망을 일궈 가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생명공동체를 위해 만든 인터넷 사업체의 대표(그는 실제 방송대 전산학과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한 전문 웹마스터다)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지난 1일, 전주 한옥마을의 양사재에서는 그를 위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책을 내놓고도 쑥스러워 주위에 책을 돌리는 일에도 나서지 못하는 그를 위해 선후배들이 등떠밀어 마련한 자리였다.

 

“기왕에 내놓은 책이니 자연의 한 부분으로 주변 모두를 감사하게 공손히 받아들이면서 자기를 조화시키는 그런 삶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눌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나누어 갖는 일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의 책이 더불어 일러주는 이치다.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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