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을 찾아가는 날.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였다. 눈은 오지 않았다. 실상사는 산을 오르지 않고도 산문에 이를 수 있는 평평한 길에 닿아있다. 추위로부터 한참이나 비켜나있는 실상사의 겨울은 뜻밖에도 가을빛이다.
간혹 내비치는 햇빛과 매서운 바람이 얼핏 스치듯 만나는 풍경은 끊임없이 생명과 평화와 공존의 삶을 모색하는 실상사의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지점을 닮았다. 점심 공양이 막 시작됐다. 바리 안 비빔밥 한 그릇에 국 한사발. 그러나 남루하지 않다.
'공양 마치고 뒷편으로 오시오' 스님이 먼저 나가셨다.
한해의 끄트머리, 새해 아침 독자들을 위해 남원 실상사 도법스님(54)을 만났다. 2001년 2월 시작한 천일기도를 지난 11월 12일 끝낸 스님은 새로운 형태의 평화운동체인 '지리산생명결사'를 다시 만들어 '생명과 평화를 가꾸고 얻는 일'을 시작했다.
'모두 함께 가야 합니다.' 스님은 단호했다.
자기성찰 있어야 인간다운 삶 회복
1000일. 스님이 산문을 넘어서지 않고 하루 네차례, 다섯시간 이상 생명과 평화와 민족화해를 위해 기도에 매달리는 중에도 전쟁은 났고, 생명은 파괴되고 갈등과 반목은 깊어졌다.
"스님이 기도에 들어가시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요.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기도는 무엇을 추구하던지 일차적으로는 자기 성찰 입니다. 성찰은 우리 삶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밥 먹고 물 마시는 것 같이 해야지요. 우리 삶의 어떤 것도 성찰을 통해서만 진짜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짜를 통해 진실에 눈뜨게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이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된다면 기도의 의미는 그 과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리석은 물음이었다.
"기도를 통해 힘과 승리의 논리가 얼마나 못쓸 논리인지를 다시 확인했죠. 우리는 부자와 힘의 논리가 우리를 행복해지게 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비인간적으로 병들게 하고, 결국 생명을 황폐화 시켜 위기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성찰의 시간을 박탈당한 시대. 범부들도 일상에서 꾸준히 성찰하면 진실이 보일까. 스님은 “성찰 하면 '너'가 보이고 공존과 협력과 삶의 태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새만금,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가 해법이다
스님의 화두는 줄곧 '생명'이다. 그러니 새만금이 거론되지 않을 수 없다.
"해법은 따로 있지 않아요. 그 문제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가 바로 해법이죠. 새만금의 생태 환경 문제는 범지구적인 것이고, 나아가서는 21세기라는 세기적 문제입니다. 그러니 새만금을 전북이라는 지역적 문제로만 인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그는 오랫동안 전북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소외감과 정치적으로 탄압받고 경제적으로 외면 받았다는 패배의식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만금과 전북의 입장을 운명적인 것으로 묶어두고 새만금에 전북의 미래가 걸려 있는 것처럼 몰고 가는 태도와 관점은 온당치 않다는 입장이다.
"새만금은 전라북도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고, 국가 범지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관점을 바로 세운다면 새만금 문제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전북, 농업회생으로 길 찾아야
생명과 존재의 실상을 일깨우는 일만이 우리가 살길이라면 지역의 문제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농업을 회생시켜야 합니다. 전라북도는 농도입니다. 모든 생명의 뿌리가 인간 생명의 근거지가 농업이고 농촌이지요. 생명의 안정성과 건강성이 담보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가 치료될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명의 안정성과 건강성이 뿌리내릴 수 있는 지점이 바로 농촌이고, 전북은 농업의 중요한 거점입니다. 단언컨대 농업을 살려야만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전북이 미래를 농업에서 찾고 그 주체로 서는 일은 매우 절박하고 중요합니다.”
우주는 하나, 인드라망 공동체의 실현
스님은 벌써 여러해 째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활동을 주도해오고 있다. 인드라망 공동체 실현은 스님이 벌이는 생명평화운동이 닿을 궁극적인 지점이다.
인드라망은 불교 경전 속 교리지만 그 세계관은 범 우주적인 것. 어떤 특정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가치이고 실현이다.
"자연학교나 귀농학교 모두 생명과 평화 운동 그 모두가 인드라망공동체 정신의 실현이랄 수 있습니다. 힘의 논리, 싸움과 공격의 논리는 인드라망의 세계관에 어긋나는 길이지요. 혼란과 모순과 갈등을 재생산해내는 힘의 논리를 이기려면 그 잘못에 눈뜨고 우주적 세계관인 인드라망의 정신으로 우리 삶과 사회의 흐름을 맞추어 가야 해요. "
스님은 힘과 공격의 논리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고 강조했다.
세상의 어떤 존재도 의미없는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힘의 논리는 얼마나 견고한가.
“세상에 어렵지 않은 일은 없어요. 그러나 가는 길이 살아남기 위한 몸짓이고, 그래서 꼭 가야할 길이라면 다시 일어 설 수 밖에 없지요. 좌절과 상처를 치유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새로운 힘이 됩니다.”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공존한다고 말하는 도법스님은 부안 방폐장 문제도 단순 논리를 넘어 다각적인 관점으로 보고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 과정은 치열했지만 부안 사태는 매우 중요한 성과를 남겼지요. 한국사회의 에너지 정책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국민적 각성과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 것, 지역 사회 공동의 이상과 가치를 지키고 가꾸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고, 종교인들이 벽을 허물고 만나 힘을 모았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이입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갈등과 대립을 털어내는 포용력과 화해의 성숙한 의식과 태도로 문제 해결에 나서야합니다.”
스님은 1월로 실상사 주지 8년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수행에 나선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존재의 실상에 눈떠 조화와 공생의 삶을 가꾸어나갈 수 있게 하는 나눔의 운동, ‘탁발순례’다.
‘나부터 시작하겠다.’ 도법 스님이 전하는 새해 화두, 그 길이 보인다.
● 도법스님은 제주 태생으로 김제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열 여덟살에 금산사에서 출가했다. 1992년 실상사에 들어온 이후 젊은 스님들의 수행단체인 선우도량을 세워 개력불교의 선두에 섰으며 95년부터 실상사 주지를 맡아 귀농전문학교,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를 창립, 대안교육과 환경연대 운동 등을 펼쳐왔다. 지난 조계종 사태때에는 총무원장 권한 대행을 맡아 종단 분열 위기를 극복해 불교운동의 지도자로 평가 받기도 했지만 다시 실상사로 돌아와 귀농학교 운영과 선 수행에 전념해왔다.
2001년 2월부터 산문 밖 출입을 금하고 민족화해와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천일기도를 시작, 지난 11월 천일기도를 마히는 회향식과 함께 '지리산생명평화결사'를 발족해 새로운 형태의 생명 평화운동에 나섰다.
부드러우면서도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는 논리 정연한 화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감화시킨다. 귀농운동과 생활협동조합운동 지역공동체운동 환경운동 등을 펼쳐오면서 제5회 교보환경문화상 대상을 받았으며 올해도 인성대상을 수상했다. 스님은 '글쓰는 일은 딱 질색'이라지만 '내가 본 부처' '화엄의 길, 생명의 길' '청안 청락 하십니까' 등의 저서를 통해서도 세상을 바로보게 하는 깨우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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