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전북일보와 세계일보 시 부문에서 당선한 문신씨(31). 낙선 10년차였던 그가 허무한 세월들을 보내고 한해에 두 곳에서 당선소식을 듣게 된 갑신년 새해 벽두,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당선소식이 담긴 신문이 아니라 허허로운 마음을 달랠 담배 한 가치였다.
수 차례의 도전을 통해 신춘문예와 인연을 맺었다고 해도 당선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인지 차라리 “제임스 조이스처럼 몇 일 동안 백지만 바라보거나 발자크처럼 밤새워 미친 듯이 써 내려가는 열정이 있었던 때가 좋았다”는 이들도 많다.
소설가 이외수는 첫 소설이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부끄러워 산에 들어가서 문장공부를 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쓴 부족한 소설이 이름을 얻었기에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몇 번의 낙방뒤에 당선된 소설가 구효서도 당선 소식을 듣고서 겁이 나서 본격적인 습작과 소설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의 문재가 있는 사람들이 문장공부에 매진해야할 정도니 이 부분에서 실력을 갖추기란 역시 어려운 일이다.
물론 반대의 예도 있다. 시인 이윤학씨는 신춘문예에 응모하고 곧 기약 없이 여행을 떠났다. 당선소식을 전하던 문화부 기자의 난감함은 컸으리라. 1967년 1월 군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소설가 최인호씨는 당선소식을 전해주는 상사에게 “당선 통지가 한 군데서만 왔습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의 ‘까까머리 신춘문예’ 일화다. 고교 2학년때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던 그는 신춘문예에 대한 독한 열망을 품게 됐다. 대학 입학 2년 뒤인 1966년을 ‘신춘문예 잡아먹는 해’로 정했다. 그리고 잡아먹었다.
중견작가인 소설가 윤흥길씨와 윤후명씨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겨뤘다. 비등한 실력이었지만 두 사람의 등단연수는 자그마치 11년 차이가 난다. 실력과 등단시기는 크게 관련이 없다는 한 증명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글이 있지만 인간과 인간의 삶을 생생하고 절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글은 소설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불문과 대학생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털어놓은 고백이다. 이 젊은이는 여름방학 내내 도서관에서 소설을 썼고, 단골로 다니던 다방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원고를 보여줬다. 친구들의 격려에 용기를 얻은 그는 원고를 다듬어 그 해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소설가 김승옥씨다. 그가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리게 된 이유는 상금이나 명예가 아니었다. 보다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목적이 있었다. 오직 당선에만 사활을 걸고 될까 안 될까 안절부절못하는 일부 응모자들에게 전하는 울림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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