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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내가 어렸을 적 설은

 

우리에겐 설레임으로 기다리던 설, 손을 꼽아가며 기다리던 설날이 있었다. 길게 이어진 귀성차량 행렬로 시작하여 피곤과 짜증이 얹힌 귀경차량 행렬로 끝나는 요즘과는 다른 설이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겨워지고 지루해질 무렵이면 반가운 손님처럼 오는 설날. 그랬다. 설날만큼 좋은 날은 없었다. 분주한 어머니의 치마끈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며 몇 밤만 자면 설날인지 지청구를 들어가며 묻고 또 묻곤 했으니까.

 

설날이 오면 가장 바쁜 사람은 어머니였다. 온통 어머니의 손을 거쳐야 하는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주부들이 명절증후군하며 힘들어하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집안 대청소부터 시작하여 장에 가는 날이 잦아지면 머지않아 명절이 다가온다는 신호다. 설이 가까워질수록 장을 봐 가지고 돌아오는 어머니 머리 위의 짐보따리도 점점 커졌다. 덩달아 내 즐거움도 점점 커졌다. 그 보따리엔 분명 내 것도 몇 가지쯤은 들어 있을 테니까. 잘해야 찐고구마나 먹을 수 있던 간식거리가 엿이나 유과, 잘하면 약과도 맛볼 수 있다. 과자류는 미리 만들어 놓기 때문에 일찌감치 입이 먼저 호사를 한다.

 

또다른 잊지 못할 풍경은 햇빛 좋은 날 부엌앞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깨진 기왓장을 가루내어 유기그릇을 닦던 일이다. 짚뭉치의 움직임이 더할수록 햇빛에 반짝반짝 빛이 나던 그릇들. 설명절을 앞두고 집안의 곳곳과 차례에 쓰일 것들을 깨끗이 했다.

 

설날을 기다리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기대는 설빔이었다. 새옷을 입을 수 있는 몇 안되는 날 중의 하나가 바로 설날이니까. 그 또한 어머니의 잠과 맞바꾼 그야말로 정성이 담뿍 든 것임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지만. 긴 밤 한숨 달게 자다 설풋 잠이 깰 때 보면 머리맡에서 그때까지 바느질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꿈결인 듯 보곤 했다. 그 때는 새옷을 입는 기쁨이 컸기에 어머니의 수고는 까마득히 잊었다. 오직 그 옷을 입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더 이상 손꼽을 필요도 없이 하룻밤만 남겨놓은 까치설날, 오지 않는 잠을 애써 청하며 몇 번을 뒤척이다 깜빡 잠이 들고, 일어나 보면 벌써 머리맡엔 상이 차려지고 있다. 하마 어머니는 밤을 꼬박 세웠으리라. 설빔 마무리하랴 차례상 준비하랴 긴긴 겨울밤도 짧았으리라.

 

마음껏 먹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날이 이런 명절 말고 또 얼마나 있겠는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그날만큼은 남녀노소 모두가 넉넉한 마음이 되어 서로에게 덕담을 주고 받았다. 차례를 지내고 집안어른들께 하는 세배가 끝나면 또래들끼리 모여 동네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녔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세배꾼들 왔다며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 설날인심이 한 몫을 했을 게다. 주로 곶감이며 약과 등을 한 주먹씩 쥐어주지만 때때로 빳빳한 지전을 만져볼 수 있어 기를 쓰고 세배꾼에 합세했던 것 같다.

 

세배 얘기를 하다보니 설날만 되면 어머니를 슬프게 했던 일이 생각난다. 친구들이 외갓집에 세배하러 간다면 덩달아 나도 어머니를 졸랐다. 외갓집에 왜 안가냐고, 외할머니는 왜 안계시냐고. 그럴 때마다 고향을 개성에 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여자들은 명절때가 되면 더욱 생각나는 게 친정이고,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이 친정어머니인데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친정어머니 생각에 울어머니는 아마도 속울음께나 하셨을 게다.

 

부족하고 어려움이 많았던 육칠십년대 시골시절, 그랬기에 그날만큼은 무엇이든 풍성한 설날을 그리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기다림이 사라진 지 오래다. 물론 어머니들이 정성을 들일 일도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풍요로워진 생활 덕에 그 무엇이라도 언제든지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주고 받는 선물 보따리도 커졌다. 그래도 마음이 허전하다고들 한다. 아마도 마음에서 시작해 손끝으로 마무리된 그 정성의 맛을 어떤 걸로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레임이 있어 기대를 부르고 부족함이 있으므로 만족을 느낄 줄 안다. 또한 모자람을 알기에 넉넉함을 키울 수 있다.

 

서민들 살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럴 때 마음 나누기가 쉽지 않을까. 올 설날은 좀 어렵고 힘들더라도, 또 부족하고 모자라더라도 그 곳을 사랑과 정성으로 채워 내 어렸을 적 설날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훈훈한 정이 오가는 그런 설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조경옥(시인)

 

약 력 : 전북 장수 출생

 

시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녹색시인협회 회원

 

문예동아리「끈」동인

 

시집 「그곳이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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