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출신 독립운동가 임규 선생(林圭·1867∼1948).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48인의 한 사람이었던 그가 일본 문법의 대가이며, 육당 최남선의 학문적 배경이 된 한글학자이자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성대 한국어문학부 정후수 교수가, 선생이 1941년에 낸 ‘국역 북산산고’(北山散稿·깊은샘 펴냄)를 완역해 세상에 냈다. 원문의 저자(임규)가 쓴 서문(시문)에 의하면 ‘어떤 친구가 매양 나아게 강요해서’ 엮은 순한문 시문집이다. ‘안빈(安貧)’ ‘영욕(榮辱)’ ‘의암(진주)義巖(晉州)’ 등 선생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주옥같은 한시가 실려 있다. 역자인 정 교수는 ‘어떤 친구’를 민족운동가 최규동(1882년∼1950년 납북)이라고 한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연대순도 아니고, 형식도 벗어나 ‘오래 전 것과 요즘 지은 약간 편’을 적어놓았다. “임규는 형식보다 질적인 면을 강조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는 게 정교수의 설명이다.
익산 금마면 동고도로(東古都里)에서 태어나 14살 때 당시 익산군수인 정기우의 아전으로 일했고, 일본유학시절(게이오의숙 전수학교 경제과) 조선 유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선생은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2월 일본어문법서인 ‘일문역법’을 발간했고, 3년 뒤 ‘일본어학문전편’(日本語學文典篇)과 ‘일본어학음어편’을 내놓았다. 해공 신익희와 고하 송진우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중인 출신으로 특정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외국어 학습 등 실용주의 학문을 당시의 사람들이 지녀야 할 수양 덕목이라 여긴 선생은 3·1만세운동과 관련해 1년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당시 선생은 최남선으로부터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통고문 3통과 선언서를 받고 서울을 출발, 3월 3일 이 서류를 일본의회 등 각 요로(要路) 발송에 성공했지만, 돌아오던 중 체포·압송됐다. 1963년 독립유공자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이 추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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