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에서 꿀벌을 치는 이봉명이는/자기 자신이 가끔/꿀벌이 되어 사는 꿈을 꾼다/(중략)/무주에서 이봉명이를 치는 꿀벌들은/자기 자신이 가끔 사람이 되어 사는/꿈을 꾼다/세상의 더러움을 몰라, 사람의 교활함을/아직 몰라’/(이봉명 시인의 시 ‘꿀벌2’ 부분)
무주 포내리에 바람이 분다. 넘어지는 건 나무와 숲. 이봉명씨는 금새 꿀벌이 되어 날아간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소박한 차림새. 희미한 미소 사이로 지그시 번지는 살가운 목소리. 무주에서 태어나 지금껏 무주를 지키고 있는 이봉명씨(49·무주작가회의 회장)는 벌을 치고 시를 쓴다. 아니 시를 쓰고 벌을 친다.
“올해는 날씨가 맞질 않아서 꿀이 잘 안 된다고 하네요. 꿀이 흉년이니까, 시도 그런 모양이에요.”
그는 올해 벌을 치지 않았다. 이별선언이 아니라, 잠시 별거 중이다. 그는 “꿀벌을 배신하며 한 해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에 한 번 벌을 치지 않은 해가 있었어요. 인간은 자기가 먹고 살만하면, 배신하는 못된 습성이 있지요. 그런 거였나…. 그러다 벌한테 된통 당했어요. 꿀벌과 멀리하려고 하면, 시가 잘 안 써지지요.”
오만(傲慢). 그는 한때 양봉업을 포기했던 그때 자신의 행동을 오만이라고 표현했다. “벌과의 교감을 통해 시를 쓰는” 시인이 올해 벌과의 대화를 멈춘 이유는 지천명(知天命)을 한 해 앞두고 자신의 삶과 문학세계를 되돌아보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씨가 양봉업을 시작한 것은 1981년부터. 부산에서 하던 전자사업을 그만두고 “박정희가 죽고 난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동네 목사에게 양봉업을 배웠다.
문단에 나온 것은 1991년 ‘시와 의식’ 신인상을 수상하면서지만, 그의 글쓰기는 초등학교 시절 은사였던 소설가 박범신씨와의 인연으로 시작됐을 만큼 오래다. 70·80년대 그가 줄곧 주목했던 화두는 부조리한 사회와 바로 서지 못한 역사. 그러다 십 여 년 전부터 꿀벌을 꺼내들었다.
“줄곧 내가 꿀벌을 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인가 꿀벌이 나를 친다는 것을 알았어요. 꿀벌이 우리를 치고 있구나, 나와 우리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있구나, 싶었지요. 그때부터 꿀벌의 눈으로 제 모습과 세상살이를 바라보고, 시로 옮겼습니다.”
머리 속에서 왱왱거리는 시어들. ‘멀리 있는 것들만 바라보지 말고, 가장 가깝게 있는 벌과의 교감을 시로 옮겨라’고 했던 스승의 호통도 그와 벌을 가깝게 한 동력이었다. 그런 스승은 “이봉명은 산을 닮았다”고 말했다. 수십만 마리의 벌들이 노닐며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피워내는 산.
“벌들이 가진 섭리를 알아야 해요. 벌은 자신들만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해서 생명을 잉태하는 귀하고 귀한 자연이에요. 저도 벌과 같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한 깨달음. 그는 사람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돕고 이해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꿀벌과 꿀벌이 노니는 자연처럼.
15편의 꿀벌 연작과 꿀벌을 주요 제재로 한 50여편의 시에는 꿀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가 담겨 있다.
“벌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치는 겁니다. 내가 아니라 벌이 열심히 일하는 건데, 욕심을 부리면 안되잖아요. 살만큼만 배고프고, 밤늦도록 시를 써도 견딜 만큼만 배고파해야 벌에게 부끄럽지 않지요.”
내년에는 무주 포내리에 더 많은 벌들이 모여들 것 같다. 그리고 가끔 자신이 꿀벌이 되어 사는 꿈을 꾼다는 한 시인의 ‘꿀벌 연작’도 풍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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