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4대문화축제가 한창이었던 지난 5월 태조로. 극단 창작극회 단원들이 전주종이문화축제로 마련한 퍼포먼스 ‘지화자 한지세상’을 공연중이다. 창작극회의 대표를 역임한 류영규씨(53·전라북도 농업기술원 방송실 근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무대가 아니라 한쪽에 멈춰선 전광판을 가진 트럭으로 향한다. 화면에서는 전주4대축제와 전통술의 제조과정이 영상으로 흘러나온다.
“후배들에게 먼저 가보고 싶지만, 어쩔 건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대에 있지 않고 이 차에 있는 것을….”
전라북도 농업기술원에서 영상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그는 축제의 한 행사에 지원을 나왔다. 무대에는 오를 수 없지만 “후배들을 지켜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연극에 입문한지 올해로 31년. 후배들을 토닥거리며 변함 없이 무대를 지키고 있는 그는 줄곧 연극인의 길을 걸어왔다. 서울드라마센터 예술학교(현 서울예전)를 졸업한 그는 고(故) 박동화 선생과 인연을 맺으며 무대의 깊은 맛을 알게 됐다. 그래서인지 후배들과 함께 하는 자리마다 ‘박동화’를 습관적으로 꺼내놓기 일쑤다. 지금껏 출연한 50여편의 작품 중에서도 1977년에 공연한 ‘산천초목’(작·연출 박동화)을 대표작품으로 꼽을 정도다.
농업기술원은 연극 입문보다 한 해 적은 30년째다. 전주MBC에서 1년 남짓 라디오 드라마 전속 성우로도 생활했지만 농업기술원으로 이직해 농업방송 제작 및 진행을 맡아왔다. 연극을 삶으로 삶을 연극으로 알았지만, 생계유지가 막막한 연극무대에서 한 집안의 가장이란 감투는 예외없이 고단한 심사였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같지만, 류씨는 “연극을 하는데도 도움 받는 일이 많다”고 한다. 고정관객을 확보하는 일이나 연극을 영상물로 만들어 보존하는 일이다.
“지금은 나만 보면 슬슬 피하는 동료들도 있어요. 하지만 모두들 즐겁게 연극을 보러옵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죠. 또 연극을 촬영해서 비디오나 CD 등 독립된 영상물로 남겨놓는 소중한 작업도 알게 됐어요. 예전 작품들은 왜 영상으로 남길 생각을 안 했는지, 그게 무척 아쉬워요.”
전업연극인이 아닌 그가 연극을 하는 일은 고되다. 오후 6시 직장에서 퇴근하고, 오후 7시 극단 사무실로 다시 출근하는 그는 두 곳 모두 미안한 마음만 있다.
“다른 지역에서 공연이 있으면 더 곤혹스럽죠. 아프지도 않은데 병가를 낼 수도 없는 일이고…. 직장 동료들에게 내 일을 미루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공연 연습에 차질을 줄 수도 있으니까 단원들에게도 미안하고….”
‘소작의 땅’(1982) ‘나룻터’(2003) 등 간혹 연출을 맡기도 했지만, 배우를 고집했던 것도 그 한 원인이다.
“연출은 무대의 큰 그림 작은 그림을 빠짐없이 그려야 하고, 배우들의 세심한 일까지 챙겨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창작극회의 탄생부터 지역의 연극사를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는 그는 지난 90년대 후반 제17대 전북연극협회장을 지내며 중국 강소성과 자매결연을 비롯해 박동화동상 제막사업, 전북청소년연극제, 전북연극지 발간 등 꽤 많은 사업도 일궈냈다. 2000년 박동화연극상 대상에 이어, 지난해 전북연극상 대상을 수상했다.
“박동화 선생님으로 시작된 전북의 연극은 실력 있는 선배들과 대견한 후배들이 많습니다. 저에게 더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해주는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익산에 있는 직장 동료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는 ‘배우는 무대에서 죽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스승의 조언을 가슴에 안고 산다. “미력한 힘이 있을 때까지 무대를 지키고 싶다”는 그의 웃음은 언제나 여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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