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과 호남을 아우르는 영호대접주로 활동했던 김인배는 동학의 10대 지도자 안에 들 정도로 비중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업적에 비해 우리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묻혀있었던 것이 늘 아쉬웠어요.”
동학농민군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통과로 110년만에 재평가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몰두해 온 이이화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67)와 우윤 전주역사박물관 관장(49)이 사료 속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던 김인배의 삶을 추적했다. ‘대접주 김인배, 동학농민혁명의 선두에 서다’.
금구현 하서면 봉서마을, 지금의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가 고향인 영호대접주 김인배(1870∼1894)는 2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역사적 삶을 살아왔다. 손화중 휘하에서 출발, 전쟁을 치르는 동안 김개남 측근에서 활동하며 남원 이남을 맡았다. 그가 중심이 된 영호도회소는 동학농민전쟁사에서 다른 지역과 연대한 유일한 조직이었고, 전봉준의 주력군이 우금치에서 패퇴한 뒤에도 최후까지 전투를 벌이다 처형당했다.
“김인배는 죽음을 앞두고 처남과 같이 있었는데, 처남은 고향으로 피신시키면서도 자신은 끝까지 남아 싸우다 처형당했죠. 그런 점만 봐도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죠.”
두 저자는 김인배 고향에서 살고있는 후손들과 지역민들의 증언, 사료총서·김제지역 자료들·일본 신문기사 등 문헌기록과 현장답사 등을 통해 그의 윤곽을 그려냈다. 역사적 활동은 물론, 인간적 측면도 담아냈다.
“농민전쟁 관련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우리가 해야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농민군을 밝혀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작업입니다.”
우관장은 “농민군 관련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 항상 난점이지만, 특별법 관련 위원회가 구성되는 9월부터 본격적으로 농민군 개인을 조명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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