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전북 문화계는 바빴다.
예술인들이 쏟아낸 창작 결실 만큼, 많은 이슈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지역 문화예술계에 자극이 됐다.
2004 문화계가 남긴 명암을 엮었다.
△영화의 고향, 명성을 찾다
수려한 경관과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전북이 영화 촬영지로 급부상했다. 민간 사무국 체제를 갖춘 전주영상위원회가 ‘주홍글씨’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등 31편의 영상물을 전북으로 유치하고, 부안영상테마파크 완공과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촬영으로 영상도시를 향한 전북의 꿈은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롯데시네마, CGV, 메가박스 등 대형 영화관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도내 상영관들의 멀티플렉스화가 급속도로 이뤄졌으며,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시민영화제, 전주인권영화제, 전북여성영화제 등 다양한 성격의 영화제가 이어진 올해 전북은 영화의 고향으로서 그 명성을 찾아가고 있다.
△새롭게 등장한 문화공간
지역 문화예술인의 창작 지원을 위한 문화공간들의 개관이 뒤를 이었다. 우진문화재단은 전주시 진북동에 전시장과 공연장, 세미나실, 공연예술 전용연습실, 개인연습실 등을 갖춘 우진문화공간을 개관했으며 옥성종합건설은 전주 경원동에 옥성문화센터를 마련해 지역예술활성화 지원사업의 걸음을 뗐다. 특히 옥성문화센터안에 문을 연 소극장 ‘판’은 한 곳의 소극장만으로 공연활동을 이어왔던 연극인들에게 큰 선물을 안겼다.
남원에서도 전시 전문 화랑인 예닮갤러리가 개관했으며, 전주롯데백화점 안에도 작은 갤러리가 문을 여는 등 전시공간이 확대됐다.
△예술인 조명 사업
작고 예술인 조명 사업도 활기를 띄었다.
석정문학회와 전북문인협회, 전북작가회의 등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신석정 시인 30주기 추모문학제’를 열었고, 소설가 최명희의 고향 남원시 사매면 노봉 일원에는 주제전시관, 유물전시관, 기념탑, 혼불길 등 작가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혼불문학관이 건립됐다.
강암 송성용의 비문과 현판서를 모아 집대성한 ‘강암묵적(비문·현판)’과 ‘석정 이정직 작품집’ 등은 예술인들의 맥을 잇는 소중한 결실이었다. 지역 문화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예술인들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 기념사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여론이 예술인 조명 사업을 통해 높아진 것은 무엇보다 큰 소득이었다.
△문화계의 뜨거운 공방
올해 전북문화계는 수면위로 떠오른 쟁점이 적지 않았다.
전라북도청과 도의회 신청사 조형물(공공미술 프로젝트) 선정 과정에 대한 공정성 논란은 올 하반기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전북도는 ‘투명하고 공정한 심사였다’고 일관된 입장을 밝히고 있는 반면, 공모에 참여해 탈락한 미술인들은 대책위를 구성해 심사불공정의 문제를 제기하는 등 첨예한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
올해 민간위탁 기간이 만료되는 전주시문화시설에 대한 수탁자 선정 결과도 잡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전주시는 전통문화센터와 한옥생활체험관은 현 수탁자인 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사)전통문화사랑모임을, 공예품전시관은 전주대를 새수탁자로 선정했다. 평균득점 70점에 미달한 역사박물관은 수탁기관 선정이 보류됐다. 그러나 문화시설운영 평가에서 2년간 1위를 차지했던 한지문화진흥원이 공예품전시관 수탁에 탈락하는 ‘이변’이 일어나면서 탈락 단체들은 심사의 불공정성을 제기하고 나섰으며, 역시 뜨거운 공방이 진행중이다.
올 연말로 위탁 계약기간이 끝나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현 수탁기관인 학교법인 예원예술대 재위탁으로 일단락됐지만, 위탁 선정과정에서 공모절차와 여론수렴을 무시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수면으로 떠오른 전주시의 문화재단 설립을 둘러싸고도 공방의 수위가 높았다. 전주시는 문화재단 출연기금 1억5천만원을 확보해 내년 초 문화재단 설립을 서두르고 있지만, 문화계는 정당한 절차와 철저한 준비과정을 요구하고 있다.
△전주시 전통문화중심도시 추진
전주시가 전통문화도시의 수도(首都)로 발돋움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선언했다.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단지와 한방산업단지 조성, 이를 전라감영과 4대문 복원 등과 연계시켜 광주의 문화수도와는 차별화된 전통문화중심도시로 성장시켜나가는 복안이다.
문광부의 문화중심도시 프로젝트와 맞물린 전주의 선택은 전통문화중심도시 지정 가시화 성과로 이어지면서 문광부의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 테스크포스팀이 구성되었으며, 전주시에서도 지난 7월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을 결성,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면서 전통문화중심도시 사업에 탄력을 불어넣었다. 올해 하반기 동안 각계인사들을 초청, 전주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전통문화중심도시 지정의 당위성을 이끌어낸 추진단의 사업은 성과 못지 않게 새로운 기획으로 주목을 모았다.
△문화재 복원과 해체
일제시대 훼손됐던 우리 문화재의 민족혼 회복을 위한 복원과 해체 작업이 활발했다.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1919년 철거됐던 경기전 부속건물들이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돼 전주 경기전이 제 모습을 찾게 됐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조사작업은 전국적인 관심사가 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하고 있는 이 작업은 현재 2층까지 해체조사가 완료된 상태. 일제강점기에 쏟아부은 콘크리트 185톤을 제거했으며, 2층까지의 탑재를 수습해 정밀실측도를 작성하는등 원형보존의 기틀을 마련했다.
현재 석탑은 몇 차례 변형을 겪어 백제시대의 원형이 아니라는 사실도 발표됐다.
△문화유산의 가치 발견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발견하고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발판도 마련됐다.
문화재관리국의 백제문화권 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뤄진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주변 유적 발굴조사는 올해를 기점으로 역사를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궤도에 접어 들었다.
고대 궁성 관련시설의 대지조성과 공간구획에 대한 자료 확보, 계획적인 설계에 의한 축조양상 등을 통해 궁성 구조 확인을 비롯해 익산 왕궁리 유적은 기존에 발굴됐던 터의 구체적 확인 외에도 건물지와 유물들이 새롭게 드러나 익산 지역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조명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전주의 출판문화 뿌리를 증명하는 조선시대의 책판 목판 ‘완판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정리작업도 시작됐다.
지난 9월 전주시 목판정리사업 단체 공모에서 선정된 전북대 박물관은 완판본 5천19개 청소와 정리 및 조사연구 등을 전반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완료시기는 내년 2월 4일 예정. 그러나 조사 이후 별도 대책이 세워지지 않는 한 공간이 협소하고 방습·방충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전주 향교 장판각에 다시 보관되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완판본 보존·전시 공간 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주어졌다.
△도립미술관 개관
현대 미술의 전 장르를 수용하는 종합 현대 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개관은 올해 지역 문화예술계의 반가운 선물이었다.
도립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 전시실 5개(4백50평)와 대형수장고 2개(120평), 강당(195석), 자료열람실, 아트숍, 카페테리아, 강의실, 야외공연장, 어린이 놀이시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현대 미술의 정체성과 흐름을 보여주는 기획전은 물론, 미술에 대한 이론 및 실기강좌, 어린이 미술관 등 미술관 문화학교와 다양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내년부터 본격 운영할 예정이다. 평일 1천여명, 주말 3천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며 개관 전부터 지적됐던 지리적 접근성에 대한 우려를 씻어냈다.
△전북예총과 전북민예총 새 집행부 출범
문화예술계의 양대 산맥 전북예총과 전북민예총의 새 집행부 출범은 지역문화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했다.
8년만에 치러진 전북예총 제20대 회장 선거는 올해 초 지역 문화예술계를 뜨겁게 달궜다. 네 명의 후보와 3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황병근 현 지회장이 당선됐다.
전북예총은 자문위원회를 보강하고 발전연구위원회를 새롭게 구성하는 등 발전적 대안을 모색하고 나섰다.
지난해 출범한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전북지회는 송만규 지회장을 비롯한 제2대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전북민예총과 지역 예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전국 민속예술제 유치와 국제교류사업(러시아 우스리스크 공연) 등을 특별사업으로 선정하고 정책위원회를 설립, 도민들을 위한 문화정책과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계획이다.
△축제의 궤도찾기
민선이후 난립 양상을 띠고 있는 지역 축제에 대한 재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가운데, 김제평선축제가 문광부의 2005년 문화관광축제 최우수축제로, 무주 반딧불축제와 남원 춘향제가 지역육성축제로 선정되는 기쁨을 안겼다.
그러나 춘향문화선양회의 파행운영이 불거진 남원춘향제는 행사지원비 전액 삭감 등 축제 운영에 치명적인 결과가 이어지면서 74년 축제 전통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올해 세계 33개국 2백84편의 작품으로 다섯번째 영화제를 치른 전주국제영화제는 부산·부천과의 차별성을 확보해내면서 전주만의 색을 분명하게 살리는 데 일단 성공했다는 평가다. 주민들의 반응은 기대만큼 뜨겁지 않았지만 전주를 주목하는 마니아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일단 안정기에 접어드는 연대기적 의미를 찾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조직위가 내세웠던 ‘지역민의 신뢰와 애정의 회복, 정서적 뿌리내리기를 통한 소리축제 위상강화’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이다.
△뚜렷한 자취 남긴 작고 예술인
전통가옥의 맥을 이어온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보유자 고택영옹이 향년 91세로 세상을 떴다. 남대문과 금산사 대적광전 등 주로 국보·보물급 사찰 및 문화재 보수와 고건축물 신축에 참여해온 고인의 60여년 목수 외길은 아쉽게도 자취로만 남았다.
전북현대회화사의 1세대인 서양화가 이복수씨의 작고 소식은 문화가를 안타깝게 했다. 향년 82세. 전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53년 ‘신상미술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이래 전북서양화단을 올곧게 지켜왔다.
전북의 화랑 역사와 서단을 지켜온 월담 권영도 선생도 향년 88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8살때부터 붓을 잡기 시작해 평생 서예의 길을 걸어온 고인은 고미술수집가로 활동하면서 전주에서는 처음으로 화랑을 열어 70-80년대 전북 미술 활동을 주도했다.
문학계에서도 창작으로 젊은 인생을 살아온 이흥규 시인(향년 67세)과 아동문학가 전이곤씨(향년 56세)가 비슷한 시기에 차례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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