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01 20:02 (일)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문화일반
일반기사

[신춘문예] 통행권을 받으십시오 ②

천 변 둑 옆으로 띄엄띄엄 늘어서 있는 포플러 나무들이 바람을 맞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아침, 엄마보다 이모가 나서서 외출 채비를 서둘렀다. 엄마는 방앗간 앞으로 흘러가는 천변의 누런 흙탕물을 하염없이 바라다보고 있었고 이모는 뭐에 들뜬 사람처럼 내 머리를 빗기고 있었다. 나 어디가? 이모에게 물었다. 아빠한테 갈 거라고 했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아빠한테 가는 거라고…….아빠한테 가는 거라는 말보다는 기차 타고, 버스 타고라는 말이 더 반가웠던 나는 이모를 돌아보았다. 정말? 이모는 머리를 빗기던 손을 내려놓고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애비 보고 싶으냐? 조금 생각하다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한 번도 아빠얼굴을 본적이 없는 나인 줄 뻔히 아는 이모가 내게 아빠가 보고 싶냐고 묻다니……. 아빠가 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보고 싶지 않다고 대답해 버리면 이모가 말했던 버스 타고라는 말도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릴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함께 방앗간을 나와 천 변 둑 위를 걸어가면서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정말 기차 타는 거냐고…….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차를 타려면 역으로 가야하고 역으로 가자면 천변 둑을 따라 걸을 것이 아니라 방앗간 뒤로 나있는 시장 골목을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정말 아빠한테 가는 거 맞지? 나는 앞서 걷는 엄마를 따라잡으며 다시 엄마에게 물었다. 아침에 천변의 노란 흙탕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염없는 엄마의 시선이 이번엔 하늘 끝에 닿아있었다. 어디선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엄마의 하얀 치맛자락을 들추고 포플러 나무를 거칠게 흔들고 지나갔다. 포플러 잎들이 바람에 부딪쳐 쉐쉐…….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이윽고 누런 흙탕물 위에 마른 잎사귀를 비듬처럼 흩뿌렸다. 꽤나 빠르고 깊은 물살을 타고 잎사귀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벌써 몇 년이냐. 꼭 서방이 죽어야만 수절이더냐? 이모는 기계에서 받아낸 쌀가루를 옆 분쇄기에 쏟아 넣으면서 엄마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식새끼 찍허니 퍼질러 놓고 그날로 요양입네 허고는 시골로 들어가는 바람에 청상 아닌 청상으로 산 세월은 그렇다치자, 해애가 지금 몇 살이냐? 내년이믄 학교에 갈 나이란 말여. 이모는 나를 해애라고 불렀다. 이모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나를 해애라고 불렀다. 살아 5년은 그렇다고 치고 죽고 2년은 뭐냔 말여 이것아! 도합 칠년이다. 칠년……. 이모는 분쇄기에서 하얗게 쏟아져 나오는 쌀가루를 고무다라에 받아내며 말을 이었다. 니 나이 아직 한창이고 그나마 맡아줄 시가붙이가 있는 줄 아니께 이런 자리도 나는 것여. 엄마는 댓구없이 수돗가에서 떡쌀을 일고 있었다. 어느 집에서 맡기고 간 떡살인지 양이 많았다. 이모의 그런 지청구가 어제 오늘일이 아닌 줄 아는 나는 오히려 무심히 방앗간 바닥에 공깃돌을 뿌렸는데 그날따라 조리질을 하는 엄마의 어깨는 유난히 흔들리고 있었다. 길게 할 거 읍다. 내일이라도 당장 다녀오니라. 이모가 다짐받듯 엄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눈 한번 질끔 감았다 뜨믄 되는 것이여. 알었냐? 말하고서는 생각난 듯 이모는 공깃돌을 줍는 나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하늘만 쳐다보며 걷던 엄마가 키를 낮춰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 눈에 빨간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엄마는 그때 이모가 말했던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엄마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또독,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천 변 둑을 내려왔다. 그리고 역으로 가는 시장골목으로 들어섰다. 잰걸음으로 엄마걸음에 맞춰 걸어갈 때마다 내 발 밑에서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났다. 난생처음 가는 기차 나들이 기념으로 이모가 새로 사준 분홍색 구두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날 분홍색 구두에서 들려오던 방울소리처럼 유리구슬이 바닥에 흩어지는 것 같은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TV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하고 TV화면을 보니 TV에선 여전히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드라마가 돌아가고 있었다. 소리를 좇아 시선이 닿은 곳은 TV옆에 놓인 전화기였다. 현수가 가버린 이후로 좀처럼 그 전화기가 울리는 일이 없었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전화벨소리에 새삼스러워 하느라 전화 받는 걸 잠시 잊고 있다가 나는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현수일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수화기를 들었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남자였다. 누님? 저편에서는 송혜씨 댁이냐고 확인하고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누님 저 혁입니다. 나는 재빨리 그리 많지 않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나를 누님이라고 부를만한 남자 중에서 혁이라는 이름이…….생각을 더듬는 사이 혁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다시 말한다. 저 어렸을 적에 누님을 본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를 따라서 누님 사시는 동네에 갔었는데 물론 그때는 누님이 누님인줄 몰랐었지만요. 수화기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나는 느낀다.

 

기도원 앞에 굳은 듯 서 있던 엄마 옆에서 흙장난을 치던 꼬마가 생각난다. 내가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봄이었다.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오르는 신작로를 자전거를 달려 하교하던 길에 나는 기도원 앞에 서있는 한 여자를 보고 자전거에서 내려섰다. 해애야…….엄마가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은 해애가 아니라 혜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알았다. 내 이름이 해애가 아니라 은혜 혜. 송혜라는 걸. 혜라고 부르려면 발음상 상당히 귀찮아 진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자신들이 혜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혜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나를 낳아놓고도 나를 버려두는 것과 같은 거라고, 나는 여전히 나를 해애라고 부르고 있는 엄마에게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만 두었다. 이미 나를 져버린 사람에게 늘어놓는 투정이야말로 정말 구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애야! 엄마가 다시 나를 불렀다. 나는 엄마를 향해 돌아서는 대신 흙장난을 하고 있던 꼬마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꼬마가 환하게 웃었다. 아래 눈두덩이 도톰하게 부풀어 올라가는 바람에 웃는 아이의 눈은 초승달이 되었다. 그런 웃음을 짓던 꼬마가 혁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인가?

 

나는 전화기를 든 체 일어서서 커튼을 젖힌다. 창밖엔 아직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봄볕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억센 햇볕이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여러 번 기도원 앞을 서성이던 엄마를 보았었다. 항상 엄마 옆에는 그 꼬마임을 알아볼 만큼씩 커가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번번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머니가 위독하십니다. 혁이라는 남자가 말해놓고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전화기 속의 막막한 정적을 저 혼자 켜져 있는 TV소리가 채운다. 얼마나 잠이 들어 있었던 걸까? 건물 옆에 장승처럼 서 있는 포플러 나무의 키 큰 그림자가 건물마당에 드리어져 있다. 강물위로 튀어 오른 물고기의 반짝이는 비늘처럼, 햇빛을 등진 포플러 잎들이 시멘트마당에서 그림자로 튀어 오른다. 나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커튼자락을 부여잡았다. 버스를 탔을 때 올라오는 차멀미처럼 느닷없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 왔다. 지독한 차멀미!

 

멀미는 기차에 처음 앉았을 때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됐다. 기차에서 내려 엄마는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 옆의 약국에서 엄마는 멀미약을 사서 내게 먹였다. 하지만 멀미는 버스에서 더 심해졌다.

 

시골버스는 터미널에서 사람을 태울 때에 이미 만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버스를 탄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던 나는 꾸역꾸역 버스를 올라오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짐짝처럼 밀려다니고 있었다. 버스가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순간 엄마 손을 놓치고 말았다. 손을 놓치자 갑자기 숨이 막혀 왔다.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불안감이 나를 엄습했다. 눈 한번 질끔 감았다 뜨면 되는 것이여……. 그렇게 엄마에게 말해놓고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모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엄마를 불렀다. 그때 이미 내 목소리는 거의 울먹임이었다. 한순간에 숨구멍이 막힌 듯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버스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엄마를 부름과 동시에 쓰고 시큼한 것이 목을 넘어왔고 나는 그대로 앞의 아저씨 바지에 목엣 것을 게워내고 말았다. 아저씨가 기겁을 하며 주의를 물렸고 조금씩 뒷걸음질하는 사람들 틈에 엄마의 손이 내 손을 잡는 걸 느끼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버스 안이 아니라 엄마의 등이었다. 엄마는 나를 업고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신작로를 걷고 있었다. 시골길엔 지나는 사람도 없었고 지나는 차도 없었다. 나를 업고 걷는 엄마가 힘에 부치는지 숨소리가 거칠었지만 나는 잠에서 깨지 않은 척 했다. 엄마 등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한참을 걸어 담쟁이가 빽빽이 얽혀있는 집 앞에 섰다. 엄마가 나를 내려놨다. 땅에 내려서자 빙글 다시 한 번 어질증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대문 옆에 세워져 있는 빛바랜 철제 안내판에 글씨가 써져 있었지만 그때까지 글을 몰랐던 나는 뭐라고 써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대신 읽어 달라고 하고 엄마를 올려다보니. 엄마는 기도원 담을 억척스럽게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저거 뭐라고 읽어 엄마? 나는 다시 물었다. 생명샘 기도원. 꾹꾹 누르듯이 엄마는 안내판의 글씨를 읽어주었다. 나는 안심했다. 기도원이면 아버지가 있는 곳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 기도원에 아버지는 없었다. 엄마와 나를 맞은 사람이 아빠인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큰 아버지였다. 엄마는 그 기도원에 이미 아버지가 없는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큰아버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 무릎에서 또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깨었을 때 엄마는 없었다. 엄마는 그렇게 사라졌다. 내가 잠든 사이에 거짓말처럼…….

 

나는 우두커니 침대 위에 앉아 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교대근무를 하기 위해서는 그쯤에서 저녁을 챙겨먹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불도 켜지 않고 TV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앉아있었다. 언니 나 떠날 거야. 먹먹한 정적을 헤집고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근무를 끝내고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어둠 속에서 현수가 말했다. 수술 같은 건 이제 생각 안 할래. 그때 나는 묻고 싶었다. 현수가 말하는 수술이 다리 길이를 늘이는 수술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현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 하지만 나는 현수에게 그걸 물을 수 없었다. 어째든 변함없는 사실은 현수가 내 집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방안을 가득 채운 어둠보다 더욱 막막한 무엇인가가 밀려드는 것 같아 숨을 몰아쉬었다.

 

낮에 걸려온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사실은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계셨어요. 혁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어머니가 위독하십니다. 라고 말해놓고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변명처럼 말했었다. 정신이 흐려지고부터 건듯 하면 천호에 다녀와야 한다면서 무작정 집을 나가곤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기여 며칠 전에는 교통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정신이 든 후에 어디를 가시던 길이냐고 물어보니까 천호엘 가던 길이었다고, 네 누님을 데리러 가던 길이었다고. 그때서야 저도 알았습니다. 어린 날에 어머니를 따라 여러 번 다녀온 곳이 천호였고 그곳에서 보았던 사람이 누님이었다는 것을......,그렇게 말해놓고 혁이라는 남자는 다짐을 받듯 다시 말했다. 서울 00병원입니다. 오실 거죠? 나는 그때 대답대신 리모컨을 들어 저 혼자 떠들고 있는 TV를 껐다.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전화기 저쪽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쯤에서 전화를 끊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이번엔 전화기 저편에서 혼잣소리 같은 말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언젠가 어머님을 따라서 이모님 댁에 간 적이 있었어요. 이모님 방앗간 앞으로 꽤 넓은 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한번은 그러시더라고요. 너 낳기 전에 네 위에 누이가 한 명 있었는데 저 물살에 떠내려 보냈다고. 그때 나도 네 누이랑 같이 저 물 속으로 뛰어들었어야 하는 건데 누이만 보냈다고……. 나 살자고 네 누이만 보냈다고……. 살아있는 누님을 가슴에 묻고 사셨던 어머니세요. 용서를 하란 말은 아닙니다. 그냥 한번 손이라도 잡아주셨으면.....,

 

독백처럼 들려오던 말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사라지고 뚜뚜 신호음이 들릴 때까지 나는 한참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교대시간은 한참 지나 있었고 근무를 하기 위해서 나선 길도 아니었지만 나는 있는 힘껏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전날 TV에선 비가 올 예정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날씨는 유리알처럼 맑았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자전거 거치대에 자전거를 세우고 돌아서는데 빵빵 경음기 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리가 나는 갓길 쪽을 돌아보았다. 낮이 익은 차였지만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각양각색의 차를 대하는 내게 어디 낮이 익은 차가 한둘일까 싶어 나는 무심히 사무실을 향해 돌아섰다. 사무실 안에 근무를 바꿔줄 누군가가 있어야 할 텐데…….장미 울타리 넘어 사무실 안을 기웃거리며 걸어가고 있는데 이번엔 경음기 소리대신 송 혜씨?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뒤를 돌아보기 전에 나는 이미 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산타나의 마리아 마리아, 그 남자였다.

 

남자는 어제저녁 교대시간에 맞춰 요금소에서 날 기다렸다고 했다. 왜죠? 나는 투명스럽게 물었다. 유니폼을 차려입지 않은 부스 밖에서까지 친절을 고집할 마음은 없었다. 그야 지갑 때문이죠. 남자는 입 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남자가 던져주고 간 지갑이 생각났다.

 

나는 남자의 옆자리, 조수석에 앉았다.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건 없다. 그저 한 달 전부터 일주일에 한번, 정해놓은 것처럼 내 부스로 들어와 물색없이 수작을 걸던 남자라는 사실과 그 남자가 내민 통행권을 요금 정산기에 넣으면 서울이라는 출발지가 뜬다는 것 밖에는. 하지만 나는 남자의 차에 탔다. 어쨌든 남자의 차는 서울을 향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통행권 발급기가 가까워지자 남자가 유리창을 내린다. 통행권을 뽑아 가십시오! 요금소에 근무했던 지난 시간동안 TV소리만큼 무수히 들었던 기계음이건만 처음 듣는 것처럼 울림이 길었다. 남자가 통행권을 뽑아들고 그것을 놓아 둘만한 곳을 찾아 머뭇거리다가 옆자리의 나에게 건넨다. 나는 통행권을 받아들고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엄마 등에 업혀 처음 발을 내딛은 천호였다. 생각해보면 무덤 속 같은 시간이었다. 집을 나설 때는 그랬다. 손이나 한번 잡아보자고, 대신 발작 같은 차멀미를 감당해야 하겠지만 그저 손이나 잡아보자고. 하지만 막상 통행권을 손에 쥐고 보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서서 내가 닿을 곳이 어디인지 안개 속처럼 모호하기만 하다. 치매를 앓고 나서야 나를 데려와야 한다고 말했다는 엄마를 만나러 갈 수도 있다. 아니면 여전히 한쪽 다리를 기우뚱거리며 살고 있지만 지금은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현수를 만나러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도 현수도 정작 그 앞에 서게 되면 어떨지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전처럼 다시 발길을 돌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확실한 건 내가 지금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과 통하는 표를 얻은 양 통행권을 손에 쥐고, 지난 내 오랜 칩거를 보상받기라도 하듯 고속도로를 말 그대로 고속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멀미는 처음 남자의 차에 올라타서 훅! 새 차 냄새를 맡았을 때 이미 기미를 보였다. 제가 학교를 이쪽에서 나왔습니다. 남자가 달리는 차의 속력을 높이며 말했다. 거 있죠. 톨게이트 옆에 있는 학교…….학교 후배들하고 뭘 좀 해본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발도장 찍은지가 한 달입니다. 학교를 오가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여러 번 봤지요. 남자가 작정한 듯 이야기를 시작한다. TV토크쇼에 나와 시시콜콜한 주변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처럼……. TV가 아니니 듣기 싫다고 채널을 돌릴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자동차 시트 깊숙이 몸을 기댄다. 나는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 요금소에 도착할 즈음에는 어쩌면 이 남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때쯤이면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그것 또한 확실해질까?.

 

멀미는 아직 미미하게 목울대 안쪽에서만 바장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어쩌면 남자의 조곤조곤한 말소리가 내 지독한 차멀미를 잠재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TV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가 곤하게 나를 잠재우는 것처럼.

 

/정원자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북일보 [email protected]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