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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포] 개설 100주년 맞은 남부시장

호남 최대 물류집산지 명성 되찾는다

현대식으로 새단장하고 새출발하는 전주 남부시장. ([email protected])

“성문(전주 남서문) 밖에서부터 담배파는 연초전, 담뱃대를 파는 연죽전, 말총이나 피물과를 파는 상전, 백미와 잡곡을 파는 시게전, 진어물을 파는 생선전, 마른 어물을 파는 좌반전, 놋그릇을 파는 유기전, 누룩을 파는 곡자전, 솜을 파는 면자전, 돗자리를 파는 인석전, 실만파는 진사전, 꿀을 파는 청밀전, 각종 물감을 파는 화피전, 소금을 파는 경염전 -중략- 장롱을 파는 장전, 장작을 파는 시목전, 점사람들이 나와 앉은 옹기전, 한지파는 지물전, 미처 헤아려 챙길 사이도 없는 갖가지 물화들이 길 양편으로 쩍 벌여 내놓였는데 그 길이가 남문에서 서문까지의 오릿길 행보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잣거리 아래로 흘러가는 개천은 쪽빛으로 맑아서 길 위에 선 저자가 물빛에 드리워 또한 오릿길 저자를 이루니 그 분주함이 미처 정신을 가다듬을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김주영의 소설 ‘객주’ 중)

 

전주의 재래시장인 남부시장이 올해, 정기 공설시장으로 개설된지 1백주년이 됐다. 물론 전주의 시장역사는 그보다 훨씬 깊다. 장명수교수(전 전북대 총장)는 저서 ‘성곽발달과 도시계획연구’에서 ‘전주는 장문(場門)의 발상지이고(1947년), 남문시장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승된 한국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시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1653년부터 14년동안 제주에서 억류생활을 한 하멜의 표류기를 통해서도 전주시장의 오랜 역사는 드러난다. “거기에서 우리는 태인을 거쳐 이튿날 김제라는 작은 마을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날 밤 우리는 전주라는 큰 마을에 도착했었는데 이곳은 지난 날 왕이 살던 곳으로서 지금은 전라도 관찰사가 주재하고 있었다”며 “전주는 바다로부터 하룻길이었지만 마을이 컸고 큰장이 서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전주가 단순히 지방차원의 장시가 아니었음을 증명해주는 기록이다. 전주는 대형 거점장으로서 일본 등 수입품이 반입되었고, 전주의 장시를 통해 이 물품들이 하위의 작은 시장으로 흘러들어갔을 정도로 모든 교역의 중심이었다. 이러한 기능은 적어도 1896년 8개의 도(道)가 13개로 개편되기 전까지 지속됐다.

 

원용찬교수(전북대)도 ‘전북의 시장경제사’에서 “당시 서울의 도성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시전은 전주와 같은 대형 거점장에서도 열렸다. 전주에는 이미 시전과 가게가 즐비하고 물화와 상인이 많아서 동전을 유포하여 백성들에게 화폐사용의 편리함을 널리 실험할 수 있는 곳이었고 전주 상업도시의 중심을 이루는 남문시장은 물자와 상인으로 활기를 띠었다”고 밝히고 있다.

 

1890년대까지 번성했던 전주의 장은 남문(풍남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네개의 장을 이른다. 남문외장이었던 남문시장, 동문외장의 동문시장, 북문외장 시장, 서문외장 시장이다. 사람들은 이를 ‘남밖장’‘동밖장’식으로 불렀다. 남문시장인 남밖장이 지금의 남부시장이다. 남부시장은 당시에도 중심이 되는 장이었지만 1905년 정기 공설시장으로 개설한 이후 일본 상인들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다른 여타의 장들이 쇠퇴해 남문시장으로 통합됐다.

 

‘남부시장’이란 명칭이 정식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1936년 시장이 대폭 개축되면서부터다. 당시의 시장 규모는 5천8백여평. 오히려 지금(5천6백여평)보다도 더 넓은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용객도 많아서 일제 강점기에 쓰여진 ‘전주부사’에는 당시 1년동안 시장을 이용했던 사람들이 186만명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야말로 호남권 최대의 물류집산지로서의 기능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이후에도 남부시장은 전북의 상업과 금융, 교통의 중심적 기능을 그대로 담당했다. 실제로 남부시장은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호남 최대의 물류 집산 시장이었던 남부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을 실어나르느라 전주역(지금의 시청자리)은 물류를 운송하는 화차운행이 활발했고, 각지에서 쌀을 사러 오는 상인들이 몰려 전국의 시세가 남부시장에서 결정되었을 정도였다.

 

남부시장이 쇠퇴의 길에 들어선 것은 80년대에 들어서부터. 전주시 도심 외곽에 대형아파트와 함께 대형상가가 들어서면서 시장의 상권이 잠식당하기 시작한 때부터다.

 

그후 20여년. 남부시장은 쇠락의 길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한채 기록과 기억으로만 추억하고 있었던 옛 명성을 다시 찾으려는 재기의 출발선에 섰다.

 

재래시장을 새롭게 가꾸는 사업이 시작된 올해, 남부시장의 역사 찾기가 시작됐다.

 

"상가 리모델링해야 시장이 살아납니다" 남부시장변영회 성만용 회장

 

“젊은이들이 와야 시장이 살아납니다. 그러려면 우선 건물이 바뀌어야 해요. 상가 리모델링은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사업이지요.”

 

전주남부시장번영회 성만용회장(74)은 남부시장의 반세기 산증인이다. 열여섯살에 장삿길에 입문해 오십해. 남부시장의 흥망과 성쇠를 지켜보아온 몇 안되는 남부시장의 터줏대감이기도 한 그의 인생은 ‘남부시장의 역사’라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돈이 운영하는 건어물 상점의 점원으로 들어간지 일년됐을때 주인은 이제 독립해보라며 ‘리어카’를 마련해주었다. 노점상으로 자기 장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벌어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었다는 성회장은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장사로만 인생을 살았다.

 

‘물건 팔아 남의 돈 주머니에 넣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으나 ‘크게 욕심내지 않고 바르게 살면 뜻을 이룬다 ’는 생각으로 장사를 해온지 10여년. 30대에 이르렀을때는 남부럽지 않을만큼 큰돈을 벌었다. 손님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상점 이름도 자신의 이름을 내세웠다. ‘성만용상회’. 지금은 남의 손에 넘어갔지만 상점의 이름은 그대로다.

 

그는 11년전에 장사에서 손을 뗐다. 그렇다고 남부시장을 떠난 것은 아니다. 지난 68년, 지금의 시장 건물의 7개동이 신축됐다. 그때 성회장은 시장 사람들과 뜻을 모아 마을금고(남부시장 제일 새마을금고)를 열었다. 좀도리로 1백원, 2백원씩 거두어 설립한 마을금고의 이사장을 맡아 큰 사고없이 꾸려온 성회장은 지난해 남부새마을금고와 통합까지 이루어낸 뒤 물러났다.

 

그 대신 올해부터는 번영회 상근회장으로 시장 발전을 주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번영회장도 올해로 28년. 발족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리를 차지해온 그는 이번 임기를 채우고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다.

 

그의 삶이 이렇게 놓여있으니 남부시장과 관련한 일 어느것 하나도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지난 78년 번영회가 시장 개설 허가를 맡아 민영화를 이룬 것을 보람으로 치는 그는 큰 소망이 있다. 현재 진행중인 리모델링 사업을 무리없이 마무리하는 일과 길가에 나앉은 노점상들이 시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7동을 확보해 분양하는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그는 확신한다.

 

일흔 중반에도 청년같은 패기가 넘치는 성회장은 번영회장을 물러나면 다시 시장 안으로 돌아간다. 5남매 중 다행스럽게도 대물림하겠다며 시장으로 들어온 막내아들의 가게를 봐주는 즐거움이 쏠쏠할 것 같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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