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는 우리 한국어쪽으로 시집 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온 지 이천년이 넘는 동안(물론 비교적 늦게 시집을 와서 백년이나 이백년 밖에 안된 한자어도 있다.), 처음에는 한자어 본래의 특성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나 우리말의 풍토속에서 점차 토박이 고유의 모습을 닮는 한자어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바뀐 모습은 첫째, 말소리만 바뀐 것, 둘째, 말뜻이 바뀐 것, 셋째, 말소리와 말뜻이 모두 바뀐 것으로 갈라 볼 수 있겠다.
‘양말’은 ‘서양식 버선’ 이라는 의미의 ‘洋襪’에서 온 것으로 말소리도 말뜻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쓰이고 있으며, ‘성냥’은 석류황(石硫黃)이, ‘숭늉’은 숙냉(熟冷)이 그리고 술래잡기에서의 ‘술래’는 순라(巡邏)라는 말소리가 바뀐 것인데, 술래의 원뜻은 도둑을 잡는 ‘경찰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싱싱하다’를 생생(生生)하다와 관련을 지어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만 ‘얌체’를 염치(廉恥)와 연관시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경우는 말뜻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낱말의 말뜻은 모순을 극복하면서 종횡무진으로 바뀌기도 한다.
‘흐지부지’란 말은 어물쩍 없어짐을 가리키는 말쯤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은 ‘사리고 조심하며 숨기고 감춘다.’는 ‘휘지비지(諱之秘之)’가 말소리도 말뜻도 바뀐 결과다.
‘동냥’이란 낱말은 옛날 탁발(托鉢)하는 스님들이 밥을 얻으러 마을로 내려올 때 장대 끝에 방울을 달고 흔들었다는 ‘동령(動鈴)에서 왔고.
이렇게 우리말 속에 녹아버린 한자어를 생각하면 요즈음 물밀 듯 밀려오는 서양 외래어들도 본 모습을 잃고 흐지부지 고유어처럼 옷을 갈아입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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