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 영인본 발표한 김해정 우석대교수
이제는 해어질 대로 해어져 책장을 넘길 때면 양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떼어내야만 하는 고문서. 자칫 잘못하면 찢어지고 마는 책장은 기력이 쇠한 노교수와 닮아있다.
그러나 닳아진 책장을 넘기는 노교수의 표정에는 국어학자로서의 책임감이 서려있다. 자신의 역할이 그저 도움닫기에 그쳐도 좋다는 김해정 우석대 교수(65)가 19세기 말부터 1945년 사이에 발표된 중요 국어사 자료들을 영인본으로 발표했다. 「언역논어」 「언역맹자(상)」 「언역맹자(하)」 「언역대학, 중용, 사서석의」 「한영자뎐」 「한영대자전(상)」 「한영대자전(하)」 「삼운성휘(상)(하) 삼운성휘 보옥편」 「어록해」(홍문각) 등 총 9권. 8월 정년을 앞두고 주어진 휴식기에 책을 내기로 하고 지난해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책이 낡아서 떨어져 나가거나 글씨가 흐려져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책을 쓴 선인들은 나보다 더 많은 고민을 했을텐데 한 글자라도 섣부르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글씨들을 고증하려고 유사본이 있나 우선 확인하고 서지학을 따로 공부 했죠.”
옛날 자료를 복원하는 것은 글쓰기의 어려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단순히 옮겨쓰는 것이 아닌, 책을 썼던 사람의 정신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10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고있는 김교수에게 인내심이 없으면 이루지 못할 이 작업은 특히나 고행이다.
“우리가 사려고 하면 귀한 거라고 짐작하고 일부러 비싸게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책 하나 사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내 돈 주고 사는 것이지만 돈에 상관없이 마음이 흐뭇해져요.”
지난 40여년 동안 전국의 고서점을 돌며 수집한 책이 1천여권. 전주역사박물관이 고문서 전시를 위해 보험까지 들며 빌려갈 정도로 귀한 책도 여러권이다. 두루말이 형태의 권자장(卷子裝), 병풍처럼 일정한 폭으로 접은 절첩장(折帖裝), 인쇄된 종이를 반으로 접어붙인 호접장(蝴蝶裝), 5개 구멍을 뚫어 오침안정법으로 만든 선장(線裝) 등 장정형태도 다양하다.
국어사 자료들을 사들이는데 월급의 대부분을 써버리는 남편을 위해 아내 정은자씨(60)는 집 2층에 학원을 차려 20년 동안 뒷바라지를 했다. 김교수가 병을 얻은 뒤부터는 고서점 나들이의 동반자가 돼주고 있다.
“귀한 책들이 훼손되면 안되니까 1층과 2층 서재를 오가며 바람과 햇빛을 쐬어줍니다. 혼자서 오르내리다 다친 적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니 더이상 건강이 나빠지진 않는 것 같아요.”
띄어쓰기도 안돼 있어 건강한 사람들 조차 보기 힘든 책을 밤낮으로 들여다 보며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6시간. 건강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만류도 소용없다.
“온고지신이란 말이 있죠? 옛날 것을 왜 그렇게 붙들고 있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옛 것이 좋고 옛 선인들이 좋아서지요.”
김교수는 벌써 없어지거나 오늘날 어법에 맞지 않는 고어체 문장도 국어학자에게는 소중한 법이라고 말했다.
그가 옛 책을 옮기는 또하나의 이유는 후학들을 위해서다. 가람 선생이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샀던 책들을 서울대 가람문고에 기증했듯, 자신도 후배들을 위해 그런 성의를 보이고 싶다고 했다.
“전북대에서 향교의 완판본을 연구했지만, 나는 방각본, 서원본, 사찰본, 관판본, 개인본, 목판본, 필사본 등을 총망라해서 완판본의 역사를 정리하고 싶어요. 일제 강점 이후 출판물을 감시하기 위해 책을 대개 일본식으로 고쳤는데, 그것도 바로잡아야지요.”
고문서로 둘러싸여 있는 김교수의 작업실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컴퓨터 2대와 디지털카메라, 스캐너, 비디오가 방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사용방법을 잘 몰라서 갑갑하다”는 김교수는 서툰 솜씨로 고문서 10벌을 일일이 스캔받아 데이터베이스화 해놨다. 나머지 고서들을 CD롬으로 만드는 것이 그가 평생을 해야 할 일이다.
노교수에게는 흐르는 시간이 아깝다. 전주에 책 박물관이 생기는 날, 기쁜 마음으로 기증해야 할 고문서 관련 자료들을 서둘러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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