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항쟁은 나에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나는 한낱 민초에 불과했던 부안 군민들이 어떻게 민중으로 주체화될 수 있었는지 보았으며, 그 역사적 변신에서 새로운 민중의 힘을 발견하였습니다.”
부안 투쟁은 단순한 핵반대 투쟁이 아니었다. 한국의 원자력 확대정책을 재검토하도록 촉구하는 운동이었으며, 에너지 정책 전체를 다시 짜라는 요구였고, 나아가 주민자치를 위한 운동이었다.
자본주의적 가치를 거부하는 능동적·창조적 백수의 삶을 꿈꾸며 대부분의 청년시절을 보낸 서울을 떠나 고향 부안 줄포로 내려온 문화비평가 고길섶씨(41). 부안항쟁을 ‘코뮌놀이의 공간’으로 기억하는 그가 코뮌놀이로 본 부안항쟁 「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앨피)를 펴냈다.
“부안항쟁을 코뮌놀이로 읽어나간다면 두려움이 아니라 즐거움을, 경계심이 아니라 모험심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나 역시 부안 사람들처럼 나의 시선과 방법으로 투쟁을 창조하는 능동적 활동으로 코뮌놀이에 빠져들었습니다.”
프랑스 중세의 주민자치체를 뜻하는 ‘코뮌’(Commune). 그러나 부안의 코뮌은 계급투쟁의 효과로서 민중이 권력을 장악한 파리코뮌과는 또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부안 사람들은 권력에 ‘똥침’을 가하며 지치지 않는 투쟁의 변신술로 소통과 연대의 해방공간을 만끽했으며, 부안에서의 코뮌놀이는 주민 대중들의 즐거운 투쟁의 열정과 활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는 지탱하고 기억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쓰고자 했습니다. 무언가 말해야 했으나,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와 마주친, 혹은 나로부터 시작된 상상들, 그리고 또 다른 우리가 경험한 공통감각들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부안항쟁 내내 ‘달리는 홍보요원’이 되었던 반핵 택시들의 활약, 반핵투쟁을 통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자신의 주장을 분명하게 밝히는 방법을 배웠다는 부안의 중·고등학생, 투쟁현장에서 아버지는 시위대로 아들은 진압부대원으로 마주친 부자, 부안에서 전주까지 50여 킬로미터 구간을 삼보일배로 이어간 부안 군민들….
반핵투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옮겨놓은 그는 이제 우리는 기억투쟁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지금, 부안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투쟁을 기억하고 생태투쟁을 현재화하는 것이다. “부안항쟁을 대표하는 더 많은 역사적 기록물과 의미의 표현물들이 나와야 한다”는 고씨는 “부안 군민들의 투쟁의 고통과 아픈 상처들을 치유하는 공통 프로그램이 마련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여성과 청소년이 전면에 등장했고 조용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사회적 주체로 스스로 나서 싸운 부안. 신자유시대, 부안의 움직임은 새로운 대안이며 ‘지역이 곧 세계다’는 화두를 깨닫게 해주는 새로운 활력이다.
성균관대에서 한국철학을 전공한 고씨는 문화연대 편집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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