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 시인 김유석씨
집도 휴대전화도 불통이다. 그와의 통화는 이렇게 늘상 어렵다.
“콤바인 소리가 워낙 커서 전화소리를 못들었네요.” 막 수화기를 놓으려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농사꾼 시인 김유석씨(46)는 아침 일찍부터 논에 나가 일을 한다고 했다.
벽골제 앞. 그가 일러준대로 길게 난 논둑을 따라 갔다. 가을 걷이가 시작된 들판은 풍요롭다. 좁은 농로를 돌고 돌아서야 그가 일하고 있는 논을 찾았다. 콤바인을 운전하며 그는 한바퀴만 돌고 건너가겠다고 손짓으로 전했다. 엉키는 벼를 정리해주느라 동갑내기 아내 박영숙씨도 함께 논일에 나섰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주에서 아내와 함께 커피샵을 운영했던 김씨는 80년대 후반, 서른을 앞둔 나이에 고향으로 들어왔다. 농삿일은 가업이다. 쌈터인 김제시 죽산면 신흥리 유흥마을은 예로부터 이름난 부자마을. 대대로 농사 짓고 살아온 그의 집은 부농이었다.
“별로 고민하지 않고 들어왔어요. 집사람도 농촌 출신이어서 농삿일을 무서워 하지 않았지요.”
그가 짓는 논은 2만5천평 정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고스란히 지키지는 못했다. 몇차례 걸쳐 땅을 팔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면적은 그가 농사 짓기에 적지도 많지도 않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하기에도 그렇고, 먹고 살기에도 적당한 분량’이다.
지금 수확하고 있는 벼는 흑미. 길건너 편보다는 피해가 덜하지만 아무래도 지난 여름 집중호우의 영향때문에 수확량은 지난해만 못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번듯한데도 훑어보면 쭉정이가 많다. 그는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다’고 했다.
조생종은 이미 수확이 끝났고, 이번주 흑미 수확이 끝나면 다음주는 일반벼 수확이 시작된다. 보름이면 그의 올 한해 논농사는 대충 마무리 된다. 그러나 그의 가을 걷이 일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 혼자 농사를 짓거나 기계를 놓지 못한 농가들은 콤바인과 트랙터를 갖고 있는 그의 손을 빌어야 한다. 그의 부친은 농사 짓겠다고 고향으로 들어온 아들을 위해 농기계를 사두었다. 일손이 딸리는 농촌 현실에서 농기계는 농삿일에 서툰 그에게 큰 힘이었다. 농기계가 귀한 시절에는 농기계 임대만으로도 꽤 수입이 됐다. 그러다 YS시절 농기계 지원이 확대되면서 반값으로 떨어져 공급 과잉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3가구 중 1가구는 농기계를 갖추지 못해 본격적으로 수확이 시작되는 다음주부터 한동안그는 땀나게 일해야 한다.
“직접 벼를 베지 않으니 논 주인들은 실제 농사가 잘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콤바인으로 훑어보면 이 논의 수확량이 어떤가 알 수 있죠.” 콤바인이 한바퀴 돌고나면 논주인들은 그의 표정부터 읽는다. 그가 웃어주면 농사 잘지은 것이고 별 표정이 없으면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뜻이다.
“오늘의 농촌 현실은 암울합니다. 자재 값은 오르고 생산비는 줄어들고 수입물은 쏟아지고 있으니 농가들은 이중 부담을 안을 수 밖에 없지요. 기후도 아열대로 변하면서 수확도 예전만 못하죠.” 올해는 집중호우까지 겹쳐 겉으로 보이는만큼 풍작이 아니다. 이른바 ‘마당풍년’인 셈이다.
갈수록 노동의 강도는 높아지고 경제적 부담은 가중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다.
“장기적으로 농사는 소수집단화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전업농 구조와 전문적인 농업기술이 정착되어야 농업이 살 수 있습니다.”
전북일보와 서울신문 신문춘예에 당선한 그는 지난 6월 첫 시집(상처에 대하여)을 펴냈다. 정신적 성취를 위해 시를 놓지 않고 지켜온 결실이다. 끝내 지키겠다는 농삿일도 그의 삶에 굵은 결실을 가져다 줄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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