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의 얼굴위에 탁상용 스탠드 형광불빛이 쏟아지고 있다. 그의 손안에서 아름다운 빛이 솟아 올랐다.
“보석가공은 몸을 만드는 일이예요. 귀금속 가공은 옷이지요. 몸을 잘만들어야 어느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게 됩니다.”
익산시 영등동 귀금속2단지에 있는 보역사 김 찬 대표(57, 익산시 영등동)는 보석가공 명장이다. 지난 9월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그를 명장으로 선정했다. 보석가공 명장 선정은 두번째다. 그러나 앞서 선정된 명장은 옥조각 기능장이어서 그는 우리나라의 첫 보석가공 명장인 셈이다.
보석가공은 그의 표현대로 원석을 아름답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일이다. 원석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는 작업이지만 그는 원석이 갖고 있는 제바탕을 살려내는 과정을 즐긴다. 기존에 개발된 컷팅기법에 의존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컷팅기법을 시도하는 것은 원석이 지닌 가치를 더욱 새롭게 발견해내려는 노력이다.
프로골퍼 김미현이 우승했을때 만들어낸 ‘골프공 커팅’, 바둑판을 보고 개발한 ‘바둑무늬 커팅’, 벌집이 모태가 된 ‘벌집커팅’, 월드컵 우승을 기원하며 만들었던 ‘축구공커팅’과 ‘태극문양커팅’ , 스스로 보석의 아름다운 빛에 빠져 들어 만들었던 ‘스타커트’ 등 그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축구공커팅’은 의장등록까지 마쳤다.
그가 즐기는 원석은 수정. 그중에서도 자수정을 통해 새로운 커팅기법을 시도하고 개발한다. 덕분에 그의 작업실에는 온갖 다양한 기법으로 다듬어진 자수정이 즐비하다.
“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10개의 별이 총총히 빛나지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가 내어 보여준 자수정을 들여다보니 정말 여러개의 별빛이 쏟아지고 있다. 스타커팅으로 다듬은 ‘보석’이다.
그는 42년동안 보석가공 외길을 걸어왔다.
“4.19에 5.16까지 나라가 혼란했던 시절 집안이 몰락했어요.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서울 토박이인 그가 10대에 보석가공일을 만난 것은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다. 우리나라에 신보석가공업 역사는 짧다. 그의 지식을 빌리자면 불과 50년도 안되는 역사다. 그가 꼽는 1세대 기능인은 정인출씨. 그도 정씨로부터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 보석가공을 시작했던 몇 안되는 기능인들은 거의 독학으로 기량을 쌓았다.
‘익산 사람’이 된 것은 1982년. 익산에 회사를 열고 있던 친구의 권유때문이었다. 몇개월만 보석가공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고 내려왔던 이듬해 아예 가족들까지 이사를 해야하는 상황을 맞게됐다.
당시 익산의 귀금속단지의 주류는 합성석 가공 수출. 그러나 천연석 가공업의 부가가치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독립해 회사를 차린 것은 86년이다. 회사 이름은 처음 보석가공일을 배웠던 ‘보역사’(보석을 다스리는 회사라는 뜻)를 물려받았다.
보역사는 천연석 가공이 주업이다.
“새로운 컷팅기법을 시도하거나 디자인 모형이 필요할때는 합성석을 만지지만 아무래도 원석을 가공해 보석을 만드는 일과는 의미도 보람도 다르죠.”
그에게 보석가공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전파하는 일이다. 장신구의 역할에만 그치는 보석은 진정한 보석이 아니다. 그는 보석안에서 자연의 우주를 만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난다.
그가 권하는 좋은 보석은 다이아몬드나 루비처럼 비싸지 않은 것이라도 스스로 보아서 ‘아름답고 즐거운 것’이다. 모든 보석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자체로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오늘의 익산 귀금속단지는 부침이 심하다. 수출이 부진해진 때문이다. 그의 회사도 예전과 같지 않지만 그는 크게 실망하지도, 명장의 자격을 얻었다고 들떠하지도 않는다. 앞으로 할 수 있는만큼만 할 일을 챙길 생각인 그의 옆에는 마케팅에 뛰어든 아내 김영자씨와 보석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딸 승희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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