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들녘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날, 달력을 쳐다보니 바로 상강이었다. 그리고, 이내 기온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김장용 배추를 볏짚으로 묶어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아, 이제 겨울이 다가오는구나!
어린시절, 추위가 다가오면 월동준비를 하던 생각이 났다. 제일 중요한 것이 땔감이었다. 연탄을 사서 광에 쌓아두어 적당히 습기가 건조되어야 아궁이에서 가스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겨울이면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다음이 방문에 창호지를 갈아붙이는 일이었다. 방문을 떼어내 문살에 엷은 풀을 칠한 다음 창호지에 물을 뿜어가면서 팽팽하게 붙이고, 그 한 귀퉁이에 봄, 여름에 말려놓은 예쁜 꽃잎들을 붙인 다음 창호지 한 겹을 더 붙여 한 겨울에도 꽃잎을 바라볼 수 있게 한 후 문 가장자리에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문풍지를 붙였다.
그리고, 먹거리 준비가 되면 월동준비가 끝이었다. 추수한 벼를 사두기도 하고, 고구마 가마니를 창고에 사들이기도 하였다. 가장 클라이맥스가 김장이었을 것이다. 한 쪽에서는 큰 솥을 걸어놓고 불을 떼면서 언 손을 녹여가며배추를 절이고, 씻고, 양념을 버무려 집안 여자 어른들이 모여 앉아 백포기가 넘는 김치를 담그고, 남자 어른들은 땅을 파 겨우내 김치를 보관하여 둘 독을 묻던 일이 어린 시절 기억에는 그야말로 잔칫날 풍경으로 남아있다.
이제는 난방이야 아파트 관리비를 조금 더 내면 되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방문이 닫혀 있기는 마찬가지이니 계절이 바뀐다고 따로 창호지를 갈아붙이는 일이 있을 턱이 없다. 김장이라고 해 봤자 따뜻한 아파트에서 김치냉장고에 십여 포기의 김치를 담는 일이 고작이다. 그나마 상당수는 입맛에 맞는 김치를 주문하기도 하였는데, 금년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김장을 직접 하겠다는 집이 많은 모양이다. 굳이 다로 월동준비를 하지 않아도 겨울을 지내기에 큰 불편이 없건만, 어쩐지 겨울은 더 길고, 더 추운 듯 하다.
창호지를 바르고 김장을 하면서 이웃과 친척들이 모여서 나누던 담소,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야단을 맞기도 하고, 사고를 저지르기도 하였지만, 맛있게 양념한 김칫속을 한 입 받아먹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사이에서 흐르던 하얀 입김들이 추위를 녹였던 기억이 어슴프레 남아 있다.
아마 추위를 녹이는 것은 난방기구나 철저히 바람을 차단하는 육중한 문들만은 아닌 모양이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서로 부딪히면서 나누는 정감들이 긴 겨울을 더욱 짧게 하고, 매서운 추위에도 웃음으로 맞서게 하는 온기를 발생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겨울의 입구에서 추위를 녹이고, 겨울을 빨리 보내버릴 우리 이웃과의 따뜻한 만남을 생각해 본다. 머지않아 길에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할 것이고, 산타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라도 이웃들이 겨우살이 준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성가신 간섭을 한 번쯤 시도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연히 여유 있게 준비된 월동용품을 미리미리 나눌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오대규(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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