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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세기 전주부성 모습 가늠자

「축성계초」발견 의미

18세기 전주부성 축성 기록인 「축성계초」의 발견은 보물 308호 전주 풍남문 복원에 대한 타당성 논란 등 도시사 연구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풍남문은 옛 전주읍성의 남쪽문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1734년 관찰사 조현명이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으며,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1767년 화재로 불탄 성루를 관찰사 홍낙인이 1768년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지금 있는 문은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며, 당시 옹성 아랫부분으로 추정되는 돌이 나와 옹성이 함께 복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축성계초」는 바로 전주부성 개수를 주도했던 당시 전라감사 조현명이 기록한 문서다.

 

강원대 유재춘 교수가 발견한「축성계초」에 의하면 현재 풍남문은 1734년 개축 이전 옹성을 갖추고 1734년 개축 이후 위치에 있는 것으로, 시대 기준 등 정확한 역사적 고증 없이 복원이 이뤄졌다는 지적이다.

 

우선 풍남문 외측으로 옹성을 만들어 놓은 것은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전주부성의 형태가 아니다. 당시 실제 옹성은 북문에 설치돼 있었으며, 이것은 조선후기 그려진 전주부성 지도나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남문에 옹성이 있었던 1734년 개축 이전의 전주부성을 복원한 것이라 해도 지금의 위치가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조현명이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개축공사 당시 전주부성 전체 둘레가 2249보에서 2618보로 길어졌기 때문이다. 즉, 1734년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4대문이 확장되었고 특히 남문의 경우 홍예문으로 하면서 크게 확장됐을 것이며,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지금의 위치에 옹성 유구가 그대로 남아 있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남문이 2층루였다는 기록도 나와있어 ‘조현명이 전주부성을 개축할 당시 남문은 3층루를 세우고 다른 성문 누각은 모두 2층으로 하였다’고 기록된 일부 문헌은 적어도 「축성계초」 기록에 의하면 잘못된 것이다. 현재 풍남문은 남문 복원에 대한 문헌적 고증과 그에 따른 유적 발굴조사가 과제로 남겨졌다.

 

이 자료는 또 조현명이 개수한 뒤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성곽이 헐리기 이전까지 큰 변화없이 유지됐다는 점에서 전주부성 현황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축성계초」는 크게 6개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축성공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관찰사가 조정에 보낸 문서와 관하 읍진에 보낸 문서 내용을 기록한 것 △전주부에서 거행해야 할 사항을 기록한 것 △축성공사에 소요되는 철물, 목물, 역정을 각 읍에 분정(分定)한 내역 △축성공사와 관련된 각종 공정의 절차와 방법을 기록한 것 △축성공사를 완료한 후 공사 개략에 대한 보고와 함께 축성에 참여한 감관(監官)에 대한 포상요청을 한 내용 △전주부성 축성공사에 들어간 각종 물적자원과 비용에 대한 기록 등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전주부성 성역은 1734년 1월10일 벌석공사를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공사는 4월1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축성 공사에 필요한 인력은 중앙관서나 인근 지역 감영에 협조를 요청하고 역군을 모두 징발군으로 충당하지 않고 모군(募軍)을 병용해 기민구제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등 당시 사회경제적인 실상도 살필 수 있다.

 

축성에 동원된 인력은 순천 광주 담양 등 전라도 전역에 걸쳐 연인원 17만여명이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

 

「축성계초」를 통해 당시 전주부성의 중요성도 파악할 수 있다. 평지 축성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졌던 당시 조정을 향해 관찰사 조현명은 ‘감영이 소재하는 성은 함부로 버릴 수 없는 곳’ ‘진전(眞殿)이 봉안된 곳’ ‘경기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 지역’ 등 계문을 올려 그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 교수는「축성계초」가 조선후기 화성 축조공사에 대한 기록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보다 약 60여년 앞선 기록으로, 향후 성역(城役)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기존에 「화성성역의궤」를 제외하고는 축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알려져 있지 않던 현실에서 「축성계초」의 발견은 조선시대 성역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알 수 있는 단서다. 향후 「축성계초」와 「화성성역의궤」의 성역 소요비용과 과정에 대한 상호비교를 통해 60여년 간의 사회적 변화를 가늠하는 귀중한 자료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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