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넘길때마다 맛있는 밥상
“내 친한 친구들이 있는데, 우리는 소주에 양파를 썰어넣고 ‘양주’라 하고 마십니다. 먹보가 아니래도 음식을 먹고 마시는 일은 즐겁지요. 그것이 육신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길러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즐거워요.”
세상사 훤히 들여다 보는 혜안을 얻은 나이에 음식맛을 모를 리 없다. 잘 먹는 것 만큼 세상에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호불호는 있지만 두루 맛보며 먹는 즐거움에, ‘미식가’ 보다는 ‘잡식가’가 더 적합하다는 최승범 시인(75, 전북대 명예교수·전주스타뱅크 부설 고하문예관장). 먹거리를 세시풍물과 연결시켜 쓴 「한국의 먹거리와 풍물」(1997) 이후 지금도 월간지(「문화저널」)에 ‘풍미기행’을 연재하고 있는 그가 음식 이야기로 산문집 「풍미기행風味紀行」(시선사)을 엮어냈다.
“옛날 우리 선비들은 음식 자랑하는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외국 나들이를 가보면 작가들이 음식에 대해 쓴 것들이 종종 눈에 띄더군요. 재밌다 싶었어요.”
1985년 식생활운동본부에서 만든 「식생활」 창간호에 전주 음식의 특색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음식 이야기 1년만 연재하자는 것이 3년이 됐고, 1988년에는 ‘한국 전통의 맛과 멋을 찾아서’란 부제를 붙여 「풍미산책」을 묶어냈다. 계절별로 음식을 소개한 이 책은 ‘음식수필’이란 새 장르를 만들어 내며 4쇄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점심값이 1만원이 넘으면 죄짓는다는 것이 평소 지론인 그는 이번에도 소박한 음식들을 차려놓았다.
모내기철 갈치 토막을 하지감자에 곁들여 간장에 조려낸 갈치조림, 메뚜기 날개를 떼어 지짐이판에 기름을 둘러 볶아먹었던 메뚜기볶음, 덩어리진 선지에 콩나물과 파썰이가 소복히 담겨 지난날 시골 음식다운 투박함이 있는 선짓국 등 입맛 당기는 음식들이다.
순두부백반을 먹을 때면 아침 밥상에서 된장찌개에 든 깍둑만한 크기의 두부를 입안에 넣었다가 뜨거움에 혼난 어린 시절 경험이 떠오른다. 같이 먹으러 간 사람 이야기도 나오고 어떻게 요리하면 더 맛난지도 배울 수 있다.
국물이 한창 끓을 때엔 설렁설렁 끓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설렁탕, 파와 풋고추 썰이·고춧가루·콩나물과 달걀·김·마늘과 새우젓 등 뚝배기 하나에 오행의 빛깔이 어우러져 있는 전주콩나물국밥 이야기도 재밌다.
젓갈 하나, 고추장볶이 하나도 맛을 아는 것은 상차림을 대하면 밑반찬에 먼저 눈길이 가는 버릇 덕분이다. 음식 소개에, 음식을 맛 본 음식점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주인 이름까지 친절하게 덧붙여 놓았다.
“좁은 테두리 안에서 넉살만 부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재료와 산지가 자꾸만 바뀌어 가고 음식도 계절이 없어지는 세상에 먹는 것을 정리해 놓는 것도 뒷날에 참고가 될 것 같아요.”
“시를 쓰고 수필을 쓸 때면 우리 문화의 원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는 그는 “우리 음식에 관한 수필은 앞으로도 계속 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눈 앞에 어머니 밥상이 차려진 듯 하다. 노시인의 표현처럼 ‘포근포근한 맛’이다. 글을 풀어내는 솜씨는 맛깔스런 양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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